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롬8:18-30) 2025. 9. 21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성도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양자의 권세를 선물로 받은 자들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딸로 살아가는 자녀의 권세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일관되게 강조하고 깨우치려고 하는 사실이 이것이다. 율법의 결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죄와 사망의 결박으로부터 자유를 덧입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다. 성령은 친히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영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상속자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이란 무엇일까.
고난에서 영광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누구나 다 하나님 안에서 영광스러운 자녀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영광은 저절로 주어지는 영광이 아니다. 고난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광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노인이든 젊은이이든 그 누구나 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이 약속의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겪은 고난에 대하여 많이 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복음 전파를 위한 사도의 삶을 살면서 겪어야 했던 고난에 대하여 자세하게 간증한 적이 있다.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하여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 세 번이나 태장을 맞았다. 한번은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한 적도 있다.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바다의 위험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거짓 형제들의 모함으로 인한 위험 증 일일이 다 거론할 수조차 없다.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 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여러 번 죽을 뻔 하였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변방인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농부의 아들이었다. 지금도 시골은 열악하고 불편한 점이 적지 않은데 3000년 전의 시골 생활이 어떠하였겠는가. 더군다나 다윗은 어려서부터 들과 산으로 양떼를 이끌고 다녔다. 어려서부터 목동 생활을 하였다. 요즘 서초동 아이들처럼 유치원 때부터 원어민 교사에게 영어 수업 받고 유치원 때부터 의과 대학 진학을 목표로 양육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윗은 어려서부터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이 분명하였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에 집에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셨다. 일곱 형을 물리치고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어린 소년 다윗에게 장차 왕이 될 자로 기름 붓게 하셨다. 그러나 그날부터 다윗에게는 예상치 못한 고난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를 괴롭혔다. 다윗에게 영광스러운 날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다윗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터널을 지낸 후에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져 갔다. 우리는 시편을 읽다가 보면 고난에서 영광으로 변화되어 가는 삶을 살았던 다윗의 모습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이 세상에 고난이 없는 상급이란 없다. 고난이 없이 찾아오는 영광스러운 순간이란 없는 법이다. 과거에 한 동안 발레리나 강수지 씨의 발 사진과 축구 선수 박지성의 발 사진이 언론에 공개된 적이 있다. 피겨 스케이팅의 김연아의 발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저들의 발은 곱게 발톱을 다듬고 페티큐어를 칠한 발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본문의 묵상을 할 때마다 “고난의 십자가 없는 영광의 면류관이란 없다”라는 의미로 “NO CROSS NO CROWN”이란 표현을 인용하고는 한다.
생각하여 보라. 주변을 둘러보라.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아라. 이 세상에 고난이 없이 주어진 영광스러운 순간이 있는가.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고난이 없이 살아가는 이웃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없다. 인생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그 누구나 다 한결같은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내 몸이 건강하면 가족 중의 누군가가 병으로 고생한다. 나 자신이나 가족 중의 누군가가 상해를 입기도 한다. 어느 집은 경제적으로는 넉넉한데 가족 간에 으르렁거리며 살아간다. 어느 집은 평생 쓸 돈은 있는데 외롭고 고독하다. 누군가는 일찍이 배우자를 사별하기도 한다. 어느 집은 배우자의 불륜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무너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배우자의 무책임한 일상으로 인해서 가정이 해체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아들딸이 속을 썩인다. 어느 가정에는 태어날 때부터 건강하지 못한 자녀의 탄생으로 인해서 평생을 가슴을 쓰러 내리며 숨 졸이며 살아가기도 한다. 어느 가정은 성공만 하고 출세만 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집안에 찬 공기가 가득하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집구석이 집구석이 아니다. 누군가는 젊은 날 눈코 뜰 새 없이 돈만 많이 벌어 모으면 나중에 행복할 줄 알았는데 돈은 벌어 놓았으나 몸은 늙고 병이 들어서 하루 하루 버티며 살아간다. 비싼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겠고 아름다운 곳을 찾아 가도 즐겁지를 않다. 따뜻하게 누워도 마음이 춥다.
내일은 좋아지겠지, 장차 나아지겠지 하며 참고 견디며 버티며 이기며 살아 왔는데 정작은 세월만 흘러가고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 그럴까. 왜 그런가. 로마서 8장 17절에 그 대답이 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렇다. 예수 안에서 겪는 고난이 아니라면 그 고난은 그냥 고난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에라아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그 고난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창세기의 요셉은 애굽에 팔려간 노예였다. 17살에 시작된 노예 생활이 30살 때까지 이어졌다. 그가 28살 때에 여주인의 성적 유혹을 피하고 도망쳤는데 여주인은 자기를 강간미수범으로 남편에게 고발했다. 요셉은 결국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셨다. 성도의 고난이란 그러하여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고난으로 그 당하는 고난을 소화해 나가야 한다. 창세기의 요셉이 그런 주인공이었다. 요셉은 자기에게 닥친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요셉의 태도를 주목하셨다. 그리고 요셉을 장차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하셨다. 어떻게 하다가 보면 영광스러운 순간이 찾아 오겠지 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떻게 하다가 보면 우연히 영광스러운 순간이 찾아 오는 경우란 없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이다. 심은 만큼 거두는 법이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함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의 말씀에 대답이 있다. 성경 말씀에 능력이 있다.
창세기의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다. 저들은 아브라함의 손자들이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이다. 그런데 에서의 나중은 어떻게 되고 야곱의 나중은 어떻게 되었는가. 에서는 제 맘대로 살아 가려 했지만 야곱은 하나님 안에서 고난을 이겨 나갔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주 안에서 겪는 고난, 주님의 뜻 안에서 맞닥트리는 고난이 아니라면 그 고난은 그냥 고난 그 자체로 끝날 수도 있다. 야곱은 루스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누워 지내던 그 밤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그런 고난의 밤이 경험하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 갔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장가 들고 두 부인과 두 여종을 통해서 11명의 아들도 낳았다. 재산도 많아졌다. 거부가 되었다. 처가 살이였지만 하나님은 나중에 야곱에게 큰 재물을 안겨 주셨다. 태어나는 양과 염소마다 아롱지고 다롱진 것이 태어 났다. 라반의 허락대로 야곱은 얼룩무늬를 갖고 태어난 양과 염소를 자기 몫으로 챙겨 나갔다. 야곱에게 속한 양과 염소가 떼를 이루고 산 허리를 덮었다. 그러나 야곱이 고향을 향해 돌아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이십여년 세월이 흘러 갔지만 형 에서는 야곱의 돌아 오는 길을 환대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은 얍복강 강 저 편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였다. 천사와 씨름하며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그 밤에 야곱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혈기 등등하게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길목을 막아 서서 기다리던 형 에서의 마음이 녹아 내린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우리는 야곱의 생애에 수없이 겪고 또 겪어야 했던 고난의 장면 장면을 기억한다.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다. 야곱이 그런 고난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고난을 장차 나타날 영광스러운 영광으로 보상해 주셨다.
강화도 시골에서 고개 셋을 넘어서 중학교를 다녔다. 황해도 해주에서 강화도로 피난 와서 명맥을 이어 가던 감리교 중학교였다. 동녘의 빛이란 이름의 동광중학교는 월요일마다 한 시간씩 전교생 아침 예배를 드렸다. 김봉출 목사님은 교목이면서 영어 선생님이셨다. 전교생이 들어가는 예배당이나 강당이 없어서 학교 마당에 서서 예배를 드렸다. 자주 부르던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 지금은 338장이지만 그 때는 364장이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 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더 나가기 원합니다
교목 목사님은 학생들에게 야곱 설교와 요셉 설교를 자주 해 주셨다. 들은 이야기를 또 해 주고 또 해주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야곱의 이야기와 요셉의 이야기 속에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로마서 8장 18절의 교훈이 다 담겨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고난 뒤에 찾아 오는 영광스러운 나중을 위하여 평생을 푯대를 정하고 달려 갔다.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역사의 교훈은 반복되는 것이다. 아들딸은 낳아 키우는 부모의 잔소리는 거기서 거기다. 귀 기울여 새겨 듣고 되새겨 생각하면 다 좋고 다 유익하고 다 교훈이 되는 말씀들이다. 그렇지 않나. 부모의 잔소리 중에 버릴 것이 하나라도 있나. 아무리 못 배우고 초등학교도 못 다니신 어머니 아버지의 가르침이라도 그 잔소리 안에 인생의 금언이 다 담겨 있는 것 아닌가. 성경 말씀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오늘의 고난, 지금의 고난을 참고 견디고 이겨 내며 장차 우리 각 사람에게 보상처럼 누리게 하실 영광스러운 순간을 가슴에 품고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결박에서 자유함으로.
로마서 8장 19-22절은 바울 서신에서 유일하고 선명하게 다룬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우리는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 창조의 내용을 접하여 알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시기 이전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해와 달과 별들과 공중의 새와 땅의 뛰고 기는 짐승들과 나무와 풀을 비롯한 온갖 식물과 물 속의 물고기를 창조하셨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 세상의 만물이 다 피조물인 것이다. 인간에게 구원을 향한 열망이 있듯이 천지 만물의 피조 세계 안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이 작용하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피조물이 굴복, 썪어지는 부패, 탄식,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하였다. 맞다. 그렇다. 이 세상에 인간만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해와 달과 별들을 비롯한 우주 공간에도 피조물의 고통이 있다. 원 창조에서 벗어난 피조 세계는 만물이 탄식한다. 우리 몸의 체온이 1도만 올라가도 이상을 느낀다. 1. 5도 정도만 올라가면 정상 생활이 불가능하다. 그 이상이 되면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지구가 그런 열병을 앓고 있다. 바닷물의 수온 상승으로 인한 지구촌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뉴스는 뉴스도 아닐 정도이다. 해수면이 점점 높아져 가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에서 자유함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덧입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여전히 어리석은 우상 숭배와 이단과 사이비의 미혹에 빠져 있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종교 통합론자의 미혹이 여전하다. 그런 해괴한 이론과 다른 복음에 귀 기울이는 이들의 수도 여전하다. 잘 사는 것만이 대답인 것처럼 탐욕과 탐심의 노예가 되어 가기도 한다.
그 뿐만 아니라 피조물조차도 창조주의 손길 안에서 회복을 갈망하고 있다. 인간이 죄와 사망의 결박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를 갈망하는 것처럼 피조물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하나님 안에서는 인간만이 존귀한 것이 아니다. 천지 만물이 다 귀한 것이다. 인간의 눈에 별 것이 아닌것처럼 사소하게 보이는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다 귀한 피조물인 것이다. 우리는 코비드 –19라고 이름 붙여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위기의 날들을 지내 왔다. 인류가 발견한 바이러스의 종류는 불과 5%정도라고 한다. 인류 역사에 바이러스의 위협을 완전히 극복한 적은 천연두 외에는 단 한번도 없다고 하다. 인간은 모든 바이러스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때론 굴복하며 때론 탄식하며 때론 고통을 겪으며 살아 왔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선언은 분명하다.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은 19절, 고대하는 바 그리고 21절, 그 바라는 것이 분명하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원한다” 라는 점이다. 이것을 요한 계시록 21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아니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세계”를 보게 하셨다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 21장 5절에 보면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선언하셨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이 세상의 피조물과 이 땅의 인간이 꿈 꾸고 바라고 소망하는 바는 한결 같다. 지금의 결박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말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이 땅에서 한 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다양한 결박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몸과 마음과 생각과 환경과 여건과 대인 관계의 결박이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살아 있다는 것은 수 없는 결박의 연속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다. 누가 굴복과 종 노릇과 탄식하며 고통스러워하여햐 하는 환경을 선택하겠는가.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별의 별 일들로 인하여 인생이 피조물과 함께 굴복 당하기도 하고 종처럼 매이고 결박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성도의 소망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 각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나 보이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분명한 소망 가운데서 참고 견디며 기다리는 중에 성령의 충만함을 은혜로 체험하며 살아가게 하실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하루 하루 순간 순간 그 누군가의 도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농경 문화, 수렵 문화 가운데서 살던 선조들은 모든 먹을 거리를 스스로 해결하며 살아가야 했다. 개인적으로 혹은 가족 단위로 혹은 부족이 연합해서 산 짐승을 잡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자연 속에서 먹을 거리를 채집해서 연명하며 살았다. 그러나 목축과 농사가 가능해 지면서 생활 양식에 변화가 찾아 왔다. 오날 날은 누가 키웠는지 누가 재배했는지 누가 생산했는지 알지 못하는 먹을거리를 식탁에 올리며 살아간다. 이제는 외국산 해물과 생선과 육류가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가. 심지어는 채소와 과일도 마찬가지이다. 국경을 넘어 온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유통의 힘이다. 배달의 힘이다. 오대양 육대주의 생산과 유통이 일직선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도시 안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농산물과 축산물과 해물을 식탁에 올리며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 많고 많은 가공 식품과 생필품들은 어떤가. 그 모든 것이 서로의 도움으로 상부 상조하며 상생하는 것이다. 서로 더불어 이익을 얻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과 같은 힘 센 나라의 그 일방적인 관세 무역 협정이라는 것이 국제 상거래의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서로 자국 이익 중심으로 하려다 보니 서로 신음하며 탄식하며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어떻게 세상을 대하며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야 할까. 성령의 도우심을 힘어야 한다는 것이다.
26절에 보면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영이시다.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는 영이시다.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도 아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영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신 자녀된 성도들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우연하게 다스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미리 정하셔서 자녀 삼으신 것이다. 미리 정하셔서 부르신 것이다. 미리 정하셔서 의롭게 하신 것이다. 미리 정하셔서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와 매 순간을 주 안에서 살아가려 한다. 그래서 기도하고 그래서 주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다. 성령은 좋은 영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좋으신 아빠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고 원하고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성령이 대답이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성령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령은 유익하게 하시는 영이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의지할 때에 우리 각 사람의 앞날은 점점 영광스러워지고 점점 존귀해질 것이다. 이것이 택함 받고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누릴 특권인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