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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복음 전도자의 감사(딤전1:12-17) 202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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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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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5-09-14 22:37 조회 4 댓글 0
 

                      복음 전도자의 감사(딤전1:12-17)        2025. 9. 14

 

 

감사는 그 사람의 인격의 성숙도를 의미한다. 감사할 줄 아는 것은 삶의 만족도를 높혀가는 길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거기에 한가지의 덕목을 더 한다면 그것은 바로 ‘감사’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 곁에 있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매사에 사사건건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따지기를 좋아하며 툴툴거리는 사람의 곁에 함께 있기를 원하는가. 감사하며 살아가면 감사할 거리가 배가 된다. 그러나 반면에 매사를 못 마땅한 눈으로 바라보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시선으로 주변을 대하면 스스로 불행해 지고 마는 법이다. 콩 한톨만 있어도 서로 나누어 먹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너무나도 이기적이어서 늘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고 늘 남들을 비판하고 비난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사도 바울은“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가르쳐 주었다.

 

어떤 사람은 별것도 아닌 사소한 것에도 무척 감사해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척이나 안타깝게 여겨지는 불행한 환경과 여건도 넉넉히 소화하고 이겨내며 소망을 가지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은 믿음의 사람이다. 주의 은혜를 풍성하게 체험한 주인공이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1:14)라고 하였다. 그렇다. 은혜를 받으면 감사하게 된다. 은혜를 받고 나면 이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이전에 깨닫지 못하던 것들이 깨달아진다. 은혜를 받고 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상대방을 대하는 시선이 달라진다. 은혜를 받고 나면 일마다 때마다 주변을 보는 태도가 달라진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풍성하였다”라고 고백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은혜받은 자의 고백이요 간증인 것이다. 은혜를 풍성하게 받고 나면 나 자신이 변하게 된다. 세상은 그대로이고 주변은 그대로이고 주변 사람들도 그대로인데 내가 은혜를 받고 나면 주변과 세상이 달리 보이게 된다. 주변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고 상대방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사도 바울은 이방 지역을 위해서 복음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런 그의 감사하는 내용이 무엇이었나를 대하는 중에 은혜로운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직분을 맡겨 주신 것 감사.

우리가 잘 아는대로 사도 바울이 사도로 변화 받기 이전에는 복음 전파를 앞장서서 반대하던 자였다. 13절에서 고백하는 그대로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복음을 비방하고 교회를 박해하고 부활 신앙을 믿는 이들을 폭행하던 자였다. 그런 그를 주님은 새롭게 변화시켜서 초대 교회 이방 전도의 선봉에 세우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전 모습을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음의 진리를 몰라서 비방하고 박해하고 폭행을 일삼던 그였다. 그런 악하던 사울을 주님은 성령 충만한 복음 전도자로 변화 시키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을 사도의 한 사람으로 세워 주셨다. 디모데 전서에도 1장 1절에 보면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이라고 했다. 바울은 이처럼 자기 자신이 사도의 한 사람으로 택함 받은 사실을 편지마다에서 반드시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사도된 것이 은혜요 기쁨이요 감사요 소망이요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사도가 누구인지를 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한 12제자의 부르심을 안다. 물론 가롯 유다의 나중은 잘못 되었지만 말이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제비 뽑혀 추가된 맛디아를 포함해서 12제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런데 사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일에 앞장서던 혈기가 등등한 악한 자였다. 그런 그를 주님은 다메섹의 부르심으로 변화시키셨다. 초대 교회 이방 선교의 선봉에 세움 받은 위대한 복음 전파자로 들어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생각할 때마다 자신에게 그런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겨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살아갔다. 바울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주님께 충성된 자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기까지 동시대에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며 살던 자였다. 완전히 모세의 율법에 눈이 가려져서 복음을 복음으로 깨닫지 못하고 지내던 어리석은 율법학자였다. 그런 그를 주님은 강권적으로 택하시고 부르셔서 다메섹 체험의 주인공이 되게 하신 것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에게 ‘사도’라는 엄청난 직분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해하고 감격해 하고 자랑스러워하며 그 부르심과 직분을 충성되게 감당하고지 힘쓰고 또 힘썼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이 복음 앞에 충성되기는커녕 복음을 비방하고 복음을 믿는 성도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서던 악한 자인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은 어떤가.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나 자신이 이처럼 복음을 깨닫고 영접하여 예배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뿐만 아니라 주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충성되게 살며 헌신하며 살고 전도자로 살기를 원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 감사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군가는 “나는 아직 그렇지 못한데요. 나는 그냥 무덤덤하게 교회에 겨우 다니고 있는 정도인데요. 주변 사람들은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뭐가 뭔지 전혀 잘 모르겠는데요. 도대체 은혜가 뭔데요. 은혜받았다는 게 뭔데요. 더군다나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것이 뭘 말하는 건데요”라고 말하며 “난 아직 아닌데요”라고 자기 자신을 주님의 택하심과 부르심 앞에서 무덤덤하고 무감각한 문외한으로 여기는 그 누가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좋다.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예배자로 함께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시고 사명을 맡은 복음 전파의 직분자로 살아가도록 초청하시는 시간이 바로 이 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595장의 <나 맡은 본분은> 이런 찬송을 부를 때가 있다.

 

나 맡은 본분은 구주를 높이고

뭇 영혼 구원 얻도록 잘 인도함이라

 

부르심 받들어 내형제 섬기며

구주의 뜻을 따라서 내 정성 다하리

 

주 앞에 모든 일 잘 행케 하시고

이 후에 주님 뵈올 때 상 받게 하소서

 

나 항상 깨어서 늘 기도 힘쓰고

내 믿음 변치 않도록 날 도와 주소서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 목사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의 고백시에 곡을 붙인 은혜로운 찬송가 중의 하나이다. 

 

가정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을 잘 감당하면 가정이 행복해 진다. 남편의 자리 아내의 자리 부모의 자리 자녀의 자리를 잘 맡아 충성스러운 가족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면 가정이 행복해진다.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자리에서 주어진 직분을 충성되게 감당할 때에 자신도 행복하고 나라의 장래도 점점 밝아져 갈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을 깨닫고 은혜를 받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충성되게 여기셔서 이 직분을 맡겨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진 직분을 경홀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에서는 장자의 직분을 가볍게 여기다가 그만 동생 야곱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왕의 직분을 경홀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겼다.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을 함부로 대하였다. 하나님은 그런 사울의 왕권을 빼앗으셔서 젊은 다윗에게 맡기셨다. 가롯 유다는 12명의 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의 직분 앞에 불행한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충성할 수 있을 때에 충성하여야 한다. 헌신할 수 있을 때에 헌신하여야 한다. 일 할 수 있을 때에 일하고 섬길 수 있을 때에 섬겨야 한다. <어둔 밤 쉬 되리니>라는 330장 찬송가의 가사를 보라.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때에 일찍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일할 때 일하면서 놀지 말아라

낮에는 수고하나 쉴 때도 오겠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지는 해 비낀 볕에 힘써 일하고

그 빛이 다하여서 어둡게 되어도 할 수만 있는 대로 힘써 일하라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달란트를 받았던 세명의 종들의 비유를 잘 안다. 한 종은 책망을 받고 쫓겨 났다. 그러나 두명의 종들은 칭찬을 받았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을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25:21, 25:23)

 

올해도 남은 날들과 평생토록 앞날에 주님께 칭찬을 받으며 살아가는 직분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긍휼을 입게 해 주신 것 감사.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누구나 다 주의 긍휼을 입은 자들이다. 그렇지 않나. 주님의 긍휼하심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렇게 감격스러운 예배자들로 살아갈 수가 있었겠는가. 매 주일마다 벌어들인 소득을 구별해서 십일조를 준비하고 별의 별 헌금을 일일이 다 구별해서 담아 다가 바친다. 빈 손으로 예배하는 이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도대체 헌금이 뭘까. 주의 은혜, 주의 긍휼을 입고 그 은혜의 감격을 갖고 매 주일 예배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은 도대체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애쓰고 내가 수고하고 내가 땀 흘려서 번 돈을 가지고 가족들이 먹고 살면 됐지 은혜는 무슨 은혜, 긍휼은 무슨 긍휼...이렇게 시비를 걸어 오는 이들과는 대화할 수 없는 주제가 이것이다.

 

15절과 16절을 보라.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이 표현을 주목해 보라. 우리는 안다. 바울이 사도로 택하심을 받기 이전의 박해자 사울은 참으로 못된 인간이었다. 율법에 갇힌 자기 열심에 붙잡혀서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고 교회를 핍박하던 악한 자중의 앞잡이였다. 그랬던 그가 변화된 것이다. 새로워진 것이다. 달라진 것이다.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긍휼’이란 단어가 가장 적합할 것이다.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게 하셔서 이방의 복음 전도자로 삼아 주신 것이 감격스럽고 놀랍고 감사한 것이다.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죄책감의 고백은 성 어거스틴에게도 있었고 마틴 루터에게도 있었고 잔 칼빈에게도 있었다.

 

생각하여 보라.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시간에도 이불 속에 누워 있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주 말의 이 날 이 시간에 푹 쉬며 지내는 이들이 대개일 것이다. 그런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차려입고 머리를 꾸미고 얼굴을 단장하고 먼 길을 달려와서 예배자로 살아간다는 이 사실은 주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의 모습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이런 모습을 통해서 내 주변의 그 누군가에게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신다면”그 또한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럽고 놀라운 일인가 말이다. 주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깨달아 알고 주변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에 본을 보이는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구하며 살게 된 것을 감사.

우리가 더 이상 우상 숭배하지 않고 살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한다. 더 이상 세상사람들처럼 탐욕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한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돈돈’하면서 살아가나. 그러나 주를 믿는 성도들은 그렇게 너무 재물 욕심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면 안된다. 주님이 그런 모습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성도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사도 바울 당시에 세상 사람들은 황제를 숭배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해 질 수도 있었다. 그런 시대에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목숨을 내어 거는 일이었다. 

 

생각해 보라. 북한은 요지음 사대 세습체제를 이어가려 하고 있다. 초등학교 학생인 딸 김주애를 곁에 데리고 다니며 후계자의 입지를 강화해 가고 있다.

 

어느 글에 보니까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 동상 앞에 선 한 북한 주민이 허리를 숙여 절하기는 커녕‘김정은은 바보다’라고 소리를 쳤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인민 재판을 받게 되었다. 20년 강제 노동 수용소에 보내지는 형량이 정해졌다. 내용인 즉은 “김정은 위원장 명예 훼손죄 1년, 비밀 유포죄 19년 도합 20년 형에 처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아마도 누가 지어 만든 이야기일 것이다. 

 

인류는 오래도록 그런 환경에서 살아왔다. 우리는 다니엘 서의 내용을 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때에 유다 땅에서 수 많은 젋은이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다니엘이 그 중의 한 젊은이였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그 시대에 끌려간 유대 젊은이들이었다. 바벨론의 고관대적들의 명령을 어기고 미움을 받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고낭을 겪게 되었다. 느브갓네살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 자들은 처형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달랐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누구나 그 어떤 무엇 앞에도 절하거나 숭배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결국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극렬하게 타 오르는 풀무불 속에 던져졌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들 세 친구들을 풀무불 속에서 건져 주셨다. 이 일로 하나님은 느브갓네살 왕의 마음을 변화시키셨다. 다니엘서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단3:28-29)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다니엘은 어떠하였나. 그 당시에 다리오 왕은 바벨론을 120명의 고관들에게 나누어 통치하게 하였다. 그 위에 세 사람의 총리를 두었다. 다니엘은 그 세사람 중의 하나였다. 포로의 땅에서 출세하고 성공한 인물이었다. 다니엘은 세명의 총리들 중에서도 뛰어났다. 그의 총명함이 다리오 왕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문제는 주변의 다른 두 총리와 120명의 고관들이 항상 다니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시기하고 미워하였다. 늘 꼬투리를 잡아서 끌어 내리려고 했다. 그런 다니엘이 우상 숭배를 배격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뜻을 모아서 새롭게 법률을 만들었다. 그리고 금령을 정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누구든지 왕 이외에 그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하고 무엇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사자 굴에 던져 넣을 것이다 라고 공포하였다. 다리오 왕 때에 우상 숭배를 거절한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었다. 다니엘은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자기 집에 돌아가서 윗방에 올라갔다.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뭉을 열어 놓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였다. 하루 세 번씩 그렇게 하기를 예전에 하던 그대로 계속하였다. 다니엘 6장 10절에 보면 그 기도의 내용이 소개된다. “다니엘이...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런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보호하시고 건져 내 주셨다. 사자 굴에서 살아 남은 다니엘을 다시 대하게 된 다리오 왕이 변하였다. 다리오 왕은 전국에 조서를 내렸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였더라”(단6:27-28) 

 

그 다음 절에 보니까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단6:28)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다니엘의 하나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자.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이 감사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1:17) 우리 찬송가에는 645곡의 찬송가가 담겨 있다. 그 중에 1장이 무엇인가.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란 송영이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드리세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송 성부 성자 성령 아멘”

 

마지막 6곡은 모두가 다 <아멘> 찬송이다. 그렇다. 아멘으로 시작해서 아멘으로 끝나는 것이 찬송이다. 감사하며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영원무궁토록 돌리는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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