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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날에(사12:1—6) 20251116 추수 감사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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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5-11-16 20:17 조회 5 댓글 0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날에(사12:1—6)         2025. 11. 16  추수 감사 주일

 

주전 722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공으로 망했다. 남유다의 운명도 풍전등화와 같았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주전 701년에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함락하려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밤을 새워 기도하고 다음 날 새벽을 맞았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군대 185,000명을 송장이 되게 하셨다. 열왕기 하 19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사야는 히스기야 임금이 주님 앞으로 돌아간 그 이후까지  무려 60여년 동안이나 선지자로 쓰임을 받았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사야는 주전 680년경에 므낫세의 우상 숭배를 책망하다가 고난을 겪게 되었다.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히브리서 11장 37절에서 언급하는 ‘톱으로 켜는 것과’라는 언급은 이사야를 염두에 둔 내용이라고 전해져 온다. ‘이사야’란 에후사아 즉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이름 뜻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청년 이사야는 남왕국의 제 10대 임금이었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인 주전 739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 선한 왕 웃시야 이후에는 히스기야 말고는 요담, 아하스, 므낫세, 아몬 등 모든 왕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다. 이사야는 남 유다 백성이 장차 당할 심판과 앗수르를 비롯한 주변 나라들이 당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자세하게 예언하였다. 그러나 결코 이사야서는 심판에 대한 예언으로 끝나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끊임이 없이 반복적으로 남은자를 통해서 이룩하실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영광스러운 구원에 대하여 강조하시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사야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메시야 예언이 가장 많이 담긴 예언서이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이사야 12장이 그런 희망에 가득 찬 예언의 말씀 중의 한 곳이다. 66장 분량의 방대한 이사야서의 말씀 중에서 12장은 매우 짧다. 6절뿐이다. 그러나 본문 말씀 가운데에는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강렬한 의지가 넘치게 담겨 있다. 

 

1절과 4절에 보면, ‘그날에’ 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그 날’이란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시간을 말씀하는 것이다. 아직 남 유다가 이방의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기 이전에 이런 예언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는 고난에는 분명한 이유와 원인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살다 보면 이런 일도 겪고 저런 일도 겪는 것이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인간의 대소사에 하나님의 심판과 상급이 분명히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은 우상 숭배였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막대기와 몽둥이로 사용하여서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을 징치하신 것이다. 이사야 10장 24절에 그런 말씀이 나온다. 남 왕국 유다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북왕국의 멸망의 조짐을 보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후에도 깨닫지 못하였다. 결국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 당하고 말았다. 이런 모든 일들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 이사야서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고난과 환난과 핍박의 격동기를 지내면서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을 깨닫고 회개한 백성들을 남은자로 남겨 두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10장 20-22절에 보면,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라고 약속하셨다.  그 남은 자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하며 깨닫고 회개 한 자”들을 말씀하는 것이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을지라도 저들을 다 돌아오게 하시지 않고 남은 자만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계절이 되면 성탄절을 기다리는 강림절이 시작되기 전에 대개의 교회들이 추수 감사 예배를 드린다. 추수 감사 예배는 그 해에 그 공동체 안에 남은 자들의 예배이다. 1621년의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서 처음으로 수확을 거둔 후에 예배한 추수 감사절의 예배처럼 말이다. 한 해 동안 절반에 가까운 가족과 동료들이 죽어 갔다. 슬픔과 두려움을 딛고 살아남은 자들이 예배한 예배가 저들의 첫 추수 감사 예배였다. 추수 감사절은 거둔 곡식을 쌓아 둔다고 해서 수장절이라고도 하고 장막절 혹은 초막절이라고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때가 되면 모세 때에 선조들이 광야에서 생활했던 과거를 기억하며 절기를 지킨다.

 

하나님은 장래의 그날이 되면 남은 자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찬송을 받으실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 12장의 주요한 내용이다. 이사야 11장 마지막 절인 16절을 보라.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세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라고 하였다. 앞으로 7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비롯해서 긴긴 고난과 시련과 애통의 날들을 지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 날은 회복의 날이며 은혜의 날이며 감사의 날이며 번영이 시작되는 날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날인 것이다. 

 

본문 1절 끝에 보면“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4절에 보면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라고 하였다. 여러분은 요즘 무엇을 감사하며 생활하고 있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 감사하라”라고 하였다. 무엇을 감사하라고 하였나.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감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사랑과 인애와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런데 그런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왜 진노하셨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신 이유가 뭔가. 그 원인이 뭔가. 우상 숭배이다. 우리는 십계명의 내용을 기억한다.

 

그 첫째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둘째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라고 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나라를 통해서 겪은 그 모든 어려움의 시작은 우상 숭배이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미워하신다. 우상 숭배를 싫어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신적 존재도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외에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려는 그 모든 것이 우상 숭배의 시작이다. 그 뿌리가 탐심이며 탐욕이다. 십일조 신앙이나, 절기 신앙의 뿌리가 무엇인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인 것이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은혜 아닌 것이 단 한가지도 없다.

 

내 목숨, 내 건강, 내 지혜, 내 능력, 내 역량, 내 경험, 내가 지금도 숨을 쉬고 살며 누리는 내게 속한 그 모든 것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 그렇지 않나. 연세가 드신 어른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삭신이 쑤신다고 말한다. “삭신”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몸의 근육과 뼈마디”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그렇다.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은 피곤을 모른다. 금방 회복된다. 뼈마디와 근육이 유연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모든 것이 덜 유연해진다. 상수도도 고장나고 하수도도 약해진다. 녹내장 백내장으로 눈이 침침해 진다. 요실금과 전립선비대증으로 쩔쩔맨다. 전도서 12장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약해진다. 눈, 코, 입, 귀, 호흡기, 소화기를 비롯해서 사지 백체 구석구석이 다 약해진다. 모든 것이 힘겨워진다. 전도서 12장 5절에 보면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도서 12장의 내용은 그것이 강조가 아니다. 그런 날이 다가 오기 전에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그리하라”(전12:1-2)라고 하였다.

 

주님은 주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안위(安慰)하시는 주님이시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누구나 다 안위를 원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만 해 줘도 힘이 된다. 따뜻한 눈길만 줘도 순간 위안이 된다. 손만 꼭 잡아 줘도 힘이 된다. 진심으로 어깨만 두드려 줘도 힘이 난다. 더군다나 주께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를 안위해 주시는 그 안위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를 안위하시는하나님의 안위가 아니라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

 

미국 생활 할 때에 벤살렘 지역에 경마장이 있었다. 지금은 그 넓은 땅 빌딩을 짓고 카지노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 경마장 주변에 크고 작은 호텔들이 많았다. 값이 비싼 4성급 호텔도 있었고 저렴한 호텔들도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컴퍼트 인 호텔’이었다. ‘홀리데이 인 호텔’이나 ‘컴퍼트 인 호텔’은 교회에 외부 강사나 손님이 오시면 예약하는 단골 숙소였다. 가격 대비 깨끗하고 친절하고 주변 환경도 무난하였다. ‘컴퍼트’(comfort)가 무엇인가. ‘위로, 평안, 쾌적’하다는 뜻을 골고루 담고 있다. 호텔이란 이름 보다는 인(inn)으로 이름한 곳이 많다. 가격이 저렴하지만 별로 실망스럽지 않은 곳이다. 이름이 좋다. 하나님의 이름 중의 또 하나가 ‘안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책망하시고 벌하시고 징치하시고 진노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대하길 원하신다. 감싸시고 돌보시고 품에 안아 주시길 원하신다.“전에는 진노하셨으니 이제는 주께서 그의 진노하심으로부터 돌아서셨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의 진노는 잠깐이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을 영원히 안위하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주님께 감사하라는 것이다. 

 

최근에 경기도 성남의 어느 결혼식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버지는 딸의 결혼식 시간이 다가오는데 양복 차려입고 딸 손 잡고 예식장에 입장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예식장 주차장 한 귀퉁이 바닥에 종이를 깔고 앉았다. 신부의 부케를 만들고 있는 76세 된 친정아버지의 사진이 인터넷망을 달구었다. 신부인 딸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젊은 시절 30년 동안 꽃 가게를 운영했다는 친정 아버지의 정성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좀더 싱싱하고 좀 더 예쁜 꽃을 사랑하는 딸의 손에 안겨 주고 싶어한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걸핏하면 버럭 버럭 화를 내시고 진노하시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그 진노를 거두시고 사랑하는 백성, 사랑하는 아들딸을 안위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감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노래와 구원이시니 감사.

우리를 구원하는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것이다. 내가 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 주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천국 백성이 된 것이다. 그러면 진실로 천국 백성다운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구원을 덧입은 하나님의 아들딸다운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무한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송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라고 하였다. 이것이 감사의 이유인 것이다. 

 

출애굽기 15장 2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그렇게 찬양하였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라고 하였다. 모세는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라. 모세의 엄마 아빠인 요게벳과 아므람은 죽기를 각오하고 갓 태어난 아들 모세를 보호하였다. 모세를 삼개월 동안 숨겨서 키웠다. 애굽의 바로 왕은 태어나는 히브리 사내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모세의 엄마 아빠는 세상 왕의 명령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천지만물을 다스리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모세는 그의 엄마 아빠의 결심이 아니었으면 그만 태어나자 마자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은 모세의 엄마와 아빠의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믿음을 통해서 보호하셨다. 그런 모세가 80이 넘은 늘그막에 민족의 지도자로 쓰임을 받으며 출애굽의 감격을 경험한 후에 이렇게 노래한 것이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15:2)

 

맞다. 하나님은 그를 믿는 그 누구에게나 힘과 노래와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이시다. 시편 100편에 보면, “여호와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100:3)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4)라고 하였다. 이는 마치도 다윗의 시편 23편의 고백과도 같다. 다윗은 자신이 나라의 왕이었지만 그의 고백은 그 어느 나라의 왕들과 달랐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동서고금에 이런 신앙 고백을 가지고 살았던 왕이 몇 명이나 되는가. 대개의 사람들은 왕이 되고 나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절대 권력을 누리려고 한다. 그 권력이 영원무궁할 것처럼 착각에 빠진다. 요즘 권력자에게 줄 서기 하며 사법 질서를 무너뜨리려 하는 악의 축을 보라. 유치원 아이들도 알아 들을 수 있는 범법을 악한 방법으로 가리려 하는 시대적인 악행을 보라. 

 

동서고금에 영원한 힘과 권력이 그 어디에 있나. 그러므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과 찬양과 구원의 근본이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인칭으로 고백하고 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라고 말이다. 시편 18편에 보면 믿음의 사람 다윗의 고백이 바로 그러하다. 다윗은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이 힘의 근원이시다. 하나님만이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죄와 악에서 구원하신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이루시려는 구원을 단번의 십자가 희생 제물이 되게 하셔서 이룩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기쁜 나의 소망 되시며>라는 95장 찬송에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고는 한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 뿐일세”

 

93장 찬송 <예수는 나의 힘이요>라는 찬송가에서 우리는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내 친구, 내 기쁨, 내 소망되시니”라고 고백한다. 구절마다에서 “예수는 나의 힘이요”라고 찬송한다. 그렇다. 맞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힘과 노래와 구원의 전부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을 의지하여야 한다. 힘과 노래와 구원의 근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우리 가운데 성령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길 기도하자.  

 

 

지극히 아름다운 일을 행하셨으니 감사.

하나님의 이름을 만방에 높이며 여호와를 찬송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지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른 성경에 보면 “놀라운 일, 큰일,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영어 성경에 보면 “그가 영광스러운 일을 행하셨기(he has done glorious things) 때문에 그를 찬송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놀라운 일을 세계 만방에 알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 맞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신 하나님의 일은 놀랍고 크고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일과 요단을 건넌 일과 여리고성을 함락한 일이 저들의 힘이 아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이며 큰 일이며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주의 백성들을 바벨론으로부터 풀어 놓으시고 예루살렘에 되돌아가게 하신 일은 주님이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이시다.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놀라운 일들을 만방에 전하고 또 전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되 만방에 전하여야 한다. 6절의 표현처럼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위대하시다. 615장 찬송가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 큰 일을 행하신 주께 영광 

이 세상을 사랑해 주 오셨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사 

저 영원한 생명샘 여시었네”

 

라고 찬양하지 않나.

 

오늘의 본문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고 하였다.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에 가면 대덕산과 함백산에 있는 1,418미터의 금대봉 자락의 800미터 고지에서 샘물이 흐른다. 검룡소(儉龍沼)라고 한다. 그곳이 한강의 발원지이다. 하루 2,000-3,000톤의 맑은 물이 흘러 넘친다. 사계절 물의 온도가 9도C이다. 이 물이 남한강 물줄기 500km의 발원지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요7:37-38)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 날에 이루시리라 약속하신 이 구원의 큰 기쁨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를 믿고 누리며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복이다. 그러므로 감사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크고 놀랍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을 계속하여 이루어 가실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사무엘과 다윗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이사야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다니엘과 에스겔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남이 만난 하나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으로 만족해 하지 말자. 나에게 은혜를 베푸신 나의 체험을 이야기 하자. 이사야의 이사야 12장의 고백처럼 “나의 힘과 나의 노래와 나의 구원이신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이루시는 크고 놀랍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우리 각 사람이 이런 간증의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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