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복음(갈1:6-10) 2025. 10. 26
마틴 루터 종교 개혁
508주년 기념 주일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의 제 1차 선교 여정 중에 설립되었다. 사도행전 13장이 배경이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할 때에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진리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바울 사도 일행의 복음 전파를 못 마땅하게 여긴 유대인들의 방해로 갈라디아 교회의 복음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율법 준수와 할례의 필수를 주장하는 이들의 방해 때문이었다. 이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복음이 무엇인가.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의 복음,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너희가 받은 복음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복음이면 복음이지 다른 복음이란 없다. 이는 이해를 돕고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한 사도 바울의 독특한 표현 방법이다.
복음은 복음이지 다른 복음이란 없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갈라디아서의 본문에서 두 번이나 강조해서 언급하였다. 10절 말씀처럼 사람에게 좋게 하려고 하고,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려고 할 때에 복음은 변질되는 것이다. 복음이 변하면 이단이 되고 사이비가 되는 것이다. 오늘 읽은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의 핵심 내용이 그것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다. 예수는 부활 후 사십일을 이 땅에 더 계셨다. 그리고 승천하셨다. “예수가 누구인지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을 받는다”이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교훈이다. 이 진리를 믿지 않는 이들은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한다고 공박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진리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하였다. “나를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라고 하였다.
바울 사도의 강조는 분명하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만 의롭다하심을 받고 구원을 수 있다.
·믿음으로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된다.
·복음 안에서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는 성령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인간을 죄 사함 받게 하고 의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의 능력으로 속량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성령의 약속을 이루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도로 하여금 아들딸의 명분을 얻게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도에게 진리 안에서 자유를 선물로 주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나 자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여야 한다. 복음이란 이 모든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 사도가 깨우치고 싶어 한 내용이 이것이다.
다른 복음에는 구원이 없다. 이단과 사이비에는 구원이 없다.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 이단과 사이비의 폐해가 없었던 적은 단 한 시대도 없었다. 알곡과 가라지는 한 밭에서 자라나는 법이다. 알곡과 가라지는 추수할 날이 되면 구분되게 마련이다. 농부는 알곡은 모아서 곡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불태워 버린다.
기독교 이천 년 역사 중에 500여 년 전인 중세 시대 때에 교회에는 무슨 일들이 있었기에 개혁의 목소리가 점점 높았던 것일까.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전에는 기독교는 하나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후 우리는 교회를 구교인 가톨릭과 신교인 개신교로 구분한다.
왜 교회는 신교와 구교로 분리되었을까. 1517년 10월 31일에 34살의 사제이며 신학교 교수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비텐베르크대학교 예배당 정문에 95개 조항을 내어 건 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었다.
그 당시의 교황이나 교황청의 고위직 성직자들은 막대한 토지와 부동산을 소유하였다. 그 당시 영국의 국가 재산의 삼분의 일이 교회의 소유일 정도였다.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중세의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계명에서 벗어나서 타락되게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일일이 거론하기 조차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다. 신자는 성경 읽기를 금지시키고 라틴어 성경을 읽고 라틴어로만 설교하였다. 알아 들을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었다. 성경적이지 않은 고해성사를 강요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성찬을 주님의 살과 피라는 이론의 화체설로 잘못 가르쳤다. 성모를 숭배하게 하였다. 성모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하였다. 성인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도 하였다. 성경 역사에 없는 성모 승천 기념일을 정해서 기념하게 하였다.
로마 교황청은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 모금을 위해서 면죄부(免罪符, Indulgence)를 발행하였다. “죽은 조상이 연옥에서 고통당하는데 면죄부 구입을 위해서 연보를 드릴 때 연옥의 고통당하는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라고 설득하려 했다. 면죄부의 값이 서민의 월세 반년 치에 달했다. 소 세 마리 값이었다. 점점 부패해 가던 그 당시 교황청을 향하여 “이래선 안된다. 변해야 한다. 질문에 답하라”라고 항거에 나선 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이 마틴 루터이다.
초대 교회 시대를 벗어난 교회는 313년, 로마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1000년 세월이 다시 지나도록 이단과 사이비의 폐해, 지나친 수도원 운동의 심각성, 1096년부터 1291년까지 거의 200여년 간 이슬람과의 전쟁이 지속된 8차례의 십자군 전쟁 등 별의별 일들을 다 겪어야 했다.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증오는 하늘로 치솟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성경에서 멀어지고 세속화 되어 가며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가는 교회의 변질을 염려하여 개혁과 변화를 주창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주창한 95조항의 질의서에 보면,
-성경 말씀에 근거한 지적이고 영적인 믿음을 강조하였다.
-참회는 기독교인의 전인적 삶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회의 진정한 보물은 가장 거룩하고 영광된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한 62번째 조항은 마틴 루터의 신앙을 가장 잘 보여준 항목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통해 하늘에 들어가는 일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거짓 평화라고 공격했다.
그 당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명은 그의 종교 개혁문 95개 조항이 유럽 전역으로 멀리 멀리까지 퍼져 나가게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틴 루터는 어려서부터 명석하게 자라났다. 그 당시 독일 최고의 대학이었던 에르푸르트대학교 인문학부에 18살에 입학하였다. 22살에 2등으로 졸업하였다. 그의 보모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향해 가던 길에서 벼락을 맞고 함께 가던 친구가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충격에 빠진 그는 회개의 고백을 마음에 품고 수도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언제나 학구적이고 철학적이고 신앙심이 깊던 그는 성직자·성서학자·언어학자였다.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던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 당시에 번역된 독일어 성경은 후대에 독일어 문법의 기초가 될 정도였다.
교황청이 앞장서서 마틴 루터를 죽여 없애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 때 그 때마다 위기를 극복하게 하셨다. “사명의 사람은 그의 사명이 다 하기까지 죽지 않는다”라는 말은 그를 위해서 전해져 온 말과 같았다.
화형을 당하여 순교한 영국의 존 위크리프(John Wycliffe, 1320-1384)의 죽음과 얀 후스(Jan Hus, 1369∼1415)의 죽음 이후 100년 세월이 지난 후에 하나님은 복음의 기초 위에 든든히 세워지는 교회다운 교회의 탄생을 예고하셨다. 그 중심에 세움을 받은 인물이 마틴 루터였다.
1428년 교황은 영국의 존 위클리프의 성경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무덤에 안치된 위클리프의 유해를 무덤에서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태웠다. 그들은 그의 뼈를 태운 재를 스위프트 강에 뿌렸다. 훗날 역사가는 말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사상은 정죄되었고 그의 시신을 불태워졌다. 그 재는 스위프트 강에 뿌려졌다” 그러나 그의 개혁 사상은 죽은 후에도 계속 퍼져나갔고 종교 개혁 정신의 기초를 이루었다. 오늘날 세계 성경 번역 위원회는 위클리프의 이름을 따서 <위클리프 성경 번역 위원회>라고 불리어 지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체코의 종교 개혁가 얀 후스는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102년 전인 1415년 7월 6일, 로마 교황청에 의해서 이단자로 몰려서 화형에 처해졌다. 얀 후스가 사형 집행 전 “당신들은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사르려 하지만 100년 후에는 불태울 수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102년 후에 하나님은 마틴 루터를 통해서 타락과 부패의 온상이었던 가톨릭교회로부터 벗어나는 종교 개혁의 불길이 번져 가게 하셨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그 이름 마틴 루터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신 개혁 신앙이란 무엇일까.
오직 성경(Sola Scriptula).
그렇다. 기독교 복음의 중심은 성경이다.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 없다. 성경을 곡해하려는 이들은 “구약 성경의 그 많은 부분은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인데 어떻게 그게 성경이란 말이냐”라고 반박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인과 민족과 나라와 인류 역사의 중심이시다. 에녹의 시대에는 에녹과 동행하셨다. 노아의 시대에는 노아와 그의 가족 여덟 식구에게 함께 하셨다. 족장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성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반복하여 언급하는가. 모세는 누구이며 여호수아는 누구인가. 사무엘은 누구이며 다윗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성취되어 왔는가를 교훈하고 있다. 하나님은 개인과 가족과 자손과 각 나라와 각 민족을 포함한 전 인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신다. 그 하나는, 일반 계시이다. 하나님은 우주 삼라만상 가운데 계시며 자연의 현상 가운데서 깨닫게 하시고 교훈하신다. 이것이 일반 계시이다. 또 하나는 기록된 말씀인 특별 계시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저들이 믿음으로 살았던 그 시대의 믿음의 사람의 이야기가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에게 교훈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
라고 하였다. 성경을 캐논이라고 한다. 캐논이란 히브리어로 ‘카네’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갈대(reed)를 뜻한다. 고대에는 갈대로 길이를 쟀다. 기준, 표준, 원칙이란 의미이다. 길이는 자가 표준이다. 무게는 저울이 표준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동서고금의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그 모든 것의 표준인 것이다.
역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말씀을 따라 살았는데 잘못된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생활을 했기 때문에 타락하고 부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을 길과 진리와 영생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그 분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1편 2절의 말씀처럼“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하며 그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가 복된 자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면,“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라”(시1:3)라는 말씀의 주인공이 누구나 다 될 수 있게 해 주신다.
춥지고 덥지도 않은 이 좋은 계절에 틈틈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자.“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라고 하였다. 그 다음 절에 보니까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 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라고 하였다. 엑스레이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자세한 것이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라고 하지 않나. 자기공명영상이다. 강력한 자석과 전파를 이용해서 우리 몸의 내부를 영상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MRI는 뇌, 근육, 인대, 연골 등을 아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뇌종양이나 척추 디스크, 무릎, 어깨, 복부 등 신체에 특정 부위를 속속들이 관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영과 혼과 관절 즉 신체의 안과 밖을 나보다 훨씬 더 잘 아신다. 하나님은 나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다.
성경 말씀을 가까이 대하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우리 각 사람에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으로 은혜를 입게 해 주신다.
오직 은혜(Sola Gratia).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무섭고 엄하고 두려운 존재로만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단단히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입증한 역사적인 일이다. 이천년 전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하나님이 이 땅에 보이는 인간의 몸을 입고 탄생하신 증거이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에서나 은혜로운 기사와 표적의 중심에 늘 계셨다. 각색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귀신이 떠나갔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 배가 고픈 벳세다 광야의 수 많은 무리가 배 불리 먹고도 부스러기만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과 음료다”라고 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나리라”라고 하셨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다. 은혜가 무엇인가. 하늘과 땅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으며 살아가는 것이 은혜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택이 있다. 헐몬 산의 이슬이 시온의 들판을 적시는 것이 은혜이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시니 곧 영생이로다”라고 하였다. 시편 133편에 나오는 고백이다. 봄과 가을이 점점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누리게 하시는 은혜가 있다. 밤과 낮의 은혜가 있다. 아침과 저녁의 은혜가 있다. 어린 시절은 어린 시절대로, 청년의 때는 청년의 때 그대로, 장년과 노년의 때에는 그때에 적합하게 내려 주시는 주의 은혜가 있다. 시절을 따라 내려 주시는 주의 은혜가 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은혜라고 하지 않는다. 은혜란 그 분에게서 전적으로 거저 주어지는 혜택인 것이다. 우리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누구나 다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것이 은혜인 것처럼 말이다.
어제 오후에 구파발 전도를 했다. 은평 롯데 몰 맞은편 광장에서 땅밝기 굿판이 벌어졌다. 꽹과리, 징, 장구가 동원되었다. 사람 키 두 배쯤 되는 통 대나무로 연신 땅을 두드리며 발로 땅을 힘차게 밟았다. 남녀가 뒤섞여서 덩실거리며 춤을 추었다. 현수막에 “땅 밟기 굿”을 11월 1일에 불광역 가까이에 있는 서울 혁신파크에서 열 것이라고 홍보하고 있었다. 아마 어저께는 예행연습인 것 같았다. 요란 법석했다. “지신(地神)밟기”라고도 한다. 원래는 정월 대 보름에 한다. 사전에 찾아 보니까“땅의 수호신에게 복을 비는 전통 의식”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마을 전체의 건강과 풍요, 재물운, 자손의 복 등을 기원하는 집단적 의식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그렇게 산다. 아니 조상 대대로 그렇게 살아왔다. “다 이렇게 한 세상 살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지 은혜는 무슨 은혜”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내가 벌어 내가 먹고 누리며 살다가 가면 끝이지 무슨 은혜는 은혜란 말이냐”이렇게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면서 우상에게 빌고 미신에 빈다. 땅에 절하고 산과 바위와 바다에 절한다. 피조물 앞에서 빌고 또 빈다. 옛날에는 부뚜막에도 신이 있고 광에도 신이 있고 뒷간에도 신이 있고 장독대에도 신이 있다고 했다. 오늘날은 다른가. 여전하다. 끊임이 없는 탐심과 탐욕 가운데 미신에 사로 잡히고 우상 숭배에 사로 잡혀서 사는 현대인이 적지 않다.
은혜를 모른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라고 하였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주의 은혜를 깨달아 알고 그 은혜를 찬양하며 살아가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크나큰 은혜 중의 은혜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주님의 큰 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서 이렇게 성도의 사귐을 갖고 서로 문안하고 섬기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은혜이다.
오직 믿음 (Sola Fide).
우리는 주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늘 믿음을 확인하셨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이 크도다, 왜 의심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이처럼 예수께서는 모든 대화의 중심을 믿음에 두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라고 하셨다. 병든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찾아 왔던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스라엘에도 이만한 믿음의 사람이 없다고 하셨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하셨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라고 하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히11:1)라고 하였다.
성경은 믿음의 책이다. 성경에 하나님이 쓰신 인물들은 한결같이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기독교 이천 년 역사는 믿음의 역사이다. 우리 교회의 지난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 각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잘 되리라는 믿음, 복되리라는 믿음, 주 안에서 영생하리라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주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감사하며 은혜로운 삶을 누리며 전하며 살아가게 하시는 그 모든 바탕이 주를 향한 나의 믿음의 분량인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 소극적인 생각, 불안한 생각, 의심이 가득한 생각에 사로 잡히면 사탄 마귀가 그런 나의 생각을 좋아한다. 그래서는 잘못된 길로 이끌고 가려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사탄의 유혹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고 이겨야 한다.
마틴 루터는 1521넌에 열린 보름스 의회가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보름스 의회란 신성 로마 제국이 보름스에서 연 의회를 말한다. 그해 1월 21일 로마 교회는 마틴 루터의 사제직을 박탈하였다. 파면하였다. 4월 17일에 마틴 루터는 보름스 의회에 소환 되었다. “나는 여기 서 있고 다른 일은 할 수 없다”라는 그의 대답이 전해져 온다. 마틴 루터는 당당하였다. 그 후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신하며 지내는 9개월 동안에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업적을 남겼다. 마틴 루터는 역사적인 인물이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황제는 “마틴 루터는 이단이고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으며 체포해서 황제에게 넘겨야 하고 그의 저작들은 금서라고 발표하였다. 이 칙령은 한 번도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루터는 전생애 동안 여행을 할 수 없었으며 전적으로 자신의 군주의 보호에 의존해야 했다.” 이것에 역사에 전해지는 보름스 칙령이다. 교황 레오 10세 때의 일화이다.
마틴 루터는 보름스 시내의 모든 건물의 기왓장보다 더 많은 마귀의 시험을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며 기도했다고 한다.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찬송가의 후렴처럼“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라고 찬송하며 승리하는 나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 찬송가의 중간에 보면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라는 가사가 절마다 반복된다. 이것이 대답이다. 이것이 정답이다. 주 예수의 권세로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나를 이기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주를 믿는 믿음다운 믿음인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Sola Cristus)
역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이 천하 만물을 다스리신다. 인류 역사를 B.C와 A.D로 구분하는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예수가 역사의 중심인 것이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다. 이슬람의 마호멧, 불교의 석가, 동양에서는 공자 맹자를 말한다. 그러나 역사의 중심은 석가도 아니고 마호멧도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인 역사의 중심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신 것이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으니”(엡4:6-7)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것은 복 중의 복인 것이다. 은혜 중의 은혜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a Deo Gratia)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의 생활 지침 제 1조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르며 부끄럽게 되고 초라하게 된다. 불행하게 된다. 사울은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지만 불행하게 되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선택을 받은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불행해 지고 말았다. 지난 수요일 밤에 대한 디모데전서 1장 20절에 보면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라는 두 인물이 사도 바울이 성경에 그 이름을 실명으로 거론하는 불행한 역사의 주인공들이 아닌가. 사도 바울은 저들을 “신성 모독”한 자들이라고 했다. 디모데 후서에 보면 후메네오와 빌레도라는 사람을 다시 거론하면서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 나가는 것과 같다”고 혹평한 말씀을 대하게 된다. 장로교의 소요리문답 제 1조는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대상 16:29). 또한 성경은 사람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영광'(glory)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보드’인데, 중량, 가치, 명예를 의미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맞다. 그래야 한다. 인간이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어찌 하나님이 나의 삶을 기뻐하실까.
1517년, 종교 개혁의 중심에 세움을 받았던 마틴 루터처럼 이 시대에 하나님 중심, 예수 그리스도 중심, 성경 중심, 은혜와 믿음 중심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