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의 신앙 (골3:1-11) 2025. 8. 17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고 질문한다. 기독교의 부활은 신앙의 바탕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종교에도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없다. 2천 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이 땅에 기독교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고 배척하고 박해하는 일에 앞장 섰던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 바울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바울은 사도가 되기 전에 사울이란 이름으로 악명 높던 자였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것도 마땅하다고 여겼던 자였다. 언제나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 늘 그랬던 그가 다메섹을 향하여 가던 길에서 변화 받았다. 새 사람이 되었다. 예수의 부활을 앞장 서서 이방에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동서고금에 사람은 누구나 종교의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불교는 윤회를 주장한다. 그렇게 믿는다. 윤회란 무엇인가를 <대한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이런 예화가 나왔다.
“고려 공양왕 때 개성에 전염병이 크게 나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중에는 겨우 다섯 살된 눈먼 아이만을 남겨놓고 부모가 죽어버린 집도 있었다. 그 집에서는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부모가 죽어 아이가 굶주리게 되자, 이 개가 눈먼 동자에게 꼬리를 잡게 하여 마을의 집들을 다니면서 걸식할 수 있도록 하고, 밥을 다 먹고 나면 샘가로 데리고 가서 물을 먹여주기까지 하였다. 이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자 어명으로 개에게 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 또한, 마을에서는 이 개가 자비로운 보살이 윤회 환생한 것이라고 하여 개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합장하여 절을 올렸다고 한다”
사전 풀이의 끝에는 이런 내용도 담겨 있다. “윤회설은 현세에 사는 사람들에게 악을 배제시키고 선을 취하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역사가 법이나 규범의 제약 없이도 평화롭게 살아온 데는 이 윤회사상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며, 현재에도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는 윤회사상이 크게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윤회설이 옳다는 말인가. 선한 영향을 미쳤으니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 어리둥절해 진다. 불교의 환생론에는 육도(六道)라는 것이 있다. 다음 생에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가 아닌 인도(人道)로 태어나지 않고 천도(天道)로 환생하기 위해서 선을 행하고 그래서 바르게 살려고 한다는 내용이다. 아귀도는 굶주림의 세계, 축생은 짐승이나 벌레로 태어나는 것, 아수라는 노여움이 세계를 말한다. 말이 되나. 믿어지나. 그래서 윤회를 설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활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다. 주님의 크나큰 축복이며 선물 중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과 그 사실을 믿고 증거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부르심이며 사명이다. 그러한 은혜를 듬뿍 받고 살았던 기독교 이천년 역사의 선봉에 선 인물이 사도 바울이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이 편지를 읽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여러분”이라고 인사하였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부활 신앙의 주인공이라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에 대하여 권면하는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이다.
위의 것을 찾으라
네발 가진 짐승은 늘 땅을 내려다보면서 먹을거리만 찾는다. 먹잇감만 노린다. 그러나 인간은 짐승처럼 동물적인 본능에만 사로 잡혀서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을 헬라어로는 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라고 한다.‘위를 바라 보는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 인간은 하늘을 바라보고 위를 바라보는 존재들이다. 그렇지 않나. 인류 역사를 보라. 동서고금에 땅에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았는데 역사에 길이 남고 존경받는 인물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나. 인간은 그 누구라도 땅에 속한 것을 추구하다가 존귀하게 된 경우란 단 한 번도 없다. 세상적인 권력과 탐심에 사로 잡혀서 살았는데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시대적으로 존경 받는 역사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한 그 누군가가 있는가. 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주목하여야 한다. 믿음으로 산다는 첫 증거는 위의 것을 찾는 것이다.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위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떻게 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게 되었는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마귀는 예수께서 사십일 금식 후에 그의 곁에 다가와서 시험하려고 달려들었다. 예수께서 그런 유혹과 그런 시험에 사로잡혀서 사셨다면 하나님의 아들다움 사명을 온전히 성취할 수 있었겠는가. 마귀는 사십일 간 금식하신 예수께“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나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네가 다 주겠다.”라고 시험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차근차근 마귀의 시험을 대적하여 이기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겨라
예수의 이 같은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나. 우리가 직업이 다 다르고 사회생활하는 여건과 환경과 지식 수준이 다 다르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같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뭘 먹을까 뭘 마실까 뭘 입을까”하는 소유욕에 사로잡히면 인생은 그 누구나 다 초라해지고 만다. 세상을 보라. 권력과 명예와 부와 인기와 칭찬과 존영을 한 몸에 다 받아 누리려고 하다 보니까 하늘 꼭대기에서 땅바닥의 깊은 계곡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나. 세상 권력을 보라. 권불십년이 아니라 대단한 것 같던 권력이 삼년도 못간다.
1977년에 신학교에 입학하니까 어느 과목의 필독서 중의 하나가 에릭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었다. 내용을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소유 중심의 삶을 산 사람의 나중과 존재 중심의 삶을 산 사람의 나중은 천지 차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려면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몸을 갖고 살기에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육체의 욕심에 사로 잡히면 인간은 누구나 초라해 지고 만다. 부끄러워지고 만다. 십중팔구 망하고 만다. 시편 1편의 강조가 무엇인가.“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번성하지만 악인은 망하리로다”이다.
그러므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추구하고 말하고 행하는 바가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 위의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끊임이 없이 상고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렇다.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느냐가 곧 그 사람의 사람됨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이 말을, 말이 행동을, 행동이 습관을, 습관이 인격을, 인격이 생애 전체를 좌우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중요하다.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한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법이다.
예수께서는 평생토록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사명을 온전히 이룩하기 위한 순종의 삶을 사셨다. 그리함으로 영광 가운데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구세주의 사명을 완성하셨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을 알고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뜻과 기대 안에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나중이 복되게 된다. 그래야 그 나중의 상급이 풍성하게 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얼마 후면 지나갈 남은 여름을 잘 견뎌 내며 열매 풍성한 가을맞이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는 땽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나날을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5절의 ‘죽이라’는 뜻은‘과단성있게 결단하라’라는 뜻이다. 질질 끌려 다니며 스스로 자신에게도 실망스럽고 어리석은 행실에 사로잡히지 말고 과감히 끊고 새 삶을 살아가라는 권면이다.
땅에 있는 지체라는 것은 육체의 욕망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나. 사람은 누구나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육체의 욕망을 다스리며 살지 못하면 그 누구라도 패망하고 만다. 2절에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은 땅의 소욕을 완전히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나 금욕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땅에 있는 지쳬의 소욕이 무엇인가. 5절에 보니까,
음란(淫亂)이란 비 정상적인 성적 타락 행위를 말한다.
부정(不正)이란 정직하지 못하고 부도덕적인 문란 행위를 말한다.
사욕(邪慾)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욕망으로 인한 모든 잘못된 것을 말한다.
악한 정욕(情欲)이란 죄악된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욕망을 일컫는다.
탐심(貪心)이란 정상적이지 않은 경제적인 욕망을 말한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偶像崇拜)라고 하였다. 맞다. 우상 숭배의 뿌리는 탐심이다. 온갖 탐심으로부터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라고 교훈해 주셨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재물에 대한 탐심에 빠져 있는 것이 우상 숭배이다.
8절에 보면,
분(憤)함
노여움
악의(惡意)란 남을 해치려는 악한 감정과 악한 의도를 뜻한다.
비방(誹謗)이란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중상모략하는 것을 말한다.
부끄러운 말이란 음담패설과 비방하는 말을 뜻한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거짓말은 사실과 진실을 왜곡하는 악한 말이다. 십계명 중의 하나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20:16)라는 강조이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두려워 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 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라고 하였다.
이런 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하였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옛사람의 행위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옛사람의 행위를 벗어 버리라고 하였다. 새 옷을 입기 위해서는 낡은 옷을 벗어 버려야 하듯이 옛사람의 악한 생각과 악한 행실을 벗어 버리라는 강조이다.
새 사람답게 살아가라
어느 시대나 옷은 그 사람의 사회적인 신분과 지위를 상징한다. 그렇지 않나. 왕이 입는 옷이 따로 있었다. 왕비가 입는 옷이 따로 있었다. 출애굽기에 보면 제사장이 입는 옷이 따로 있었다. 제사장의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없다. 오직 제사장만이 입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너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3-24) 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성도를“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2:9)라고 하였다.
새 사람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졌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딸을 말한다. 그러므로 새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매 순간마다 새롭게 하심을 입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어야 합니다.
라고 교훈하고 있다. 이 시대와 거짓과 불의와 죄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기뻐하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