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자의 감사 기도Ⅱ(골1:9-14) 2025. 7. 20
이방 전도자로 부름을 받은 사도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의 기도는 그침이 없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밝히고 있다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동안 무슨 기도를 하며 지내 왔는가. 사도 바울은“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분부한 대로 자기 자신이 늘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니,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어떻게 늘 기도만 하며 살란 말이냐”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숨은 쉬고 사는 것처럼 기도란 그런 것이어야 한다. 바쁘면 바쁜 수록 더욱 더 기도해야 한다. 숨이 차면 숨이 찰수록 더욱 더 깊은 호흡을 계속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살아 있다는 것이 호흡의 연속인 것처럼 기도는 성도의 삶의 일상이어야 하는 것이다.
기도는 얼마나 오래도록 기도하느냐는 기도의 분량, 기도의 시간도 중요하지만 기도의 내용이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바울은 감사하며 주께 기도하고 있다. 바울의 그치지 않고 기도하는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기를 기도.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주께 지혜와 총명을 얻어서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가기를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하는 것으로 가득가득 채워지기를 기도하였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순간마다 크고 작은 일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 가는 것이어야 한다.‘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은 나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사명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각자 다 다른 형편 속에서 살아간다. 하루의 일과가 서로 다 다르다. 가정의 여건이 다르고 사회 생활을 하는 환경도 다 다르다. 사회적인 신분도 서로 다 다르다. 경제적인 여건도 다 다르다. 학생은 학생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사업을 하거나 상업을 하는 분들은 나름대로 그 여건을 따라서 만나는 사람, 상대하는 사람도 다 다르고 모든 것이 다 다르다. 누구는 가정에서 주부로서만 살아갈 수도 있다. 건강 상태도 서로 다 다르다. 어떤 누구는 몸이 약해서 투병 생활하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버티며 지낼 수도 있다.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2018)은 1942년에 영국 옥스포드에서 태어났다. 21살 때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물 컵을 마루 바닥에 떨어 트리기도 하고, 손에 잡고 있던 펜을 놓치기도 하였다. 걷다가 넘어지기도 하였다. 옥스포드 대학과 캠브리지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마무리하던 때였다. 앞으로 2년밖에 살 수 없을 것이란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그는 낙망을 극복하며 휠체어에 몸을 맡겼다. 컴퓨터 음성 인식기로 의사 소통을 계속해 나갔다. 그는 유머도 잃지 않았다. 그는 우주의 신비를 연구하고 시간 물리학과 요즘에야 자주 언급되는 AI 즉 인공 지능 연구 분야의 선두 주자였다. 2년밖에 못 산다던 그는 그 후 55년을 더 살며 놀라운 연구 업적을 남기도 76살에 눈을 감았다. 그는 사후 세계를 부정하고 무신론을 주장하여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다 제각기 다양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된 우리 각 사람은 분명하게 고백하고 시인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과연 나의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고 있느냐”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서 멀어지고 나면 제 멋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이는 신앙을 떠나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장춘(禹長春, 1898-1959)박사의 이름을 기억한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에서 성장한 우장춘은 농업을 전공하고 육종학자로 평생을 살았다. 우리나라의 초청으로‘한국 농업과학 연구소 초대 소장’에 취임하였다. 우장춘은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장춘은 과일과 채소의 종자를 우량종으로 개발하는데 헌신한 육종학 전문가였다. 그는 제주도 감귤, 강원도 감자, 병충해에 강한 무와 배추의 종자를 개발해 냈다. 한국 농업 근대화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정부에서 그에게 농림부 장관직을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식물학자답게 오직 종자 개발에만 전념했다. 대한민국 농업 발전에 공헌한 바가 인정되어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그런 자랑스러운 인물이 아니었다. 1895년 10월 8일,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가 시해되었다. 그날 밤,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와 그를 따르는 낭인들에게 왕궁 안의 구조를 설명하고 길 안내를 한 조선인 우범선이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이다. 우범선(禹範善, 1857-1903)은 그 당시에 일본군의 사주를 받고 창설된 서양식 군대인 별기군 부대의 대대장이었다. 그런 그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매수되었다. 역사에 있어서는 아니 될 가장 치욕스러운 현장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자기 목숨의 위협을 느낀 그는 명성 황후 시해 사건 이후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 여성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아들을 낳았다. 우범선은 아들 우장춘이 여섯 살 때에 조선인 자객의 칼에 살해 당했다. 그의 나이 46살 때의 일이다.
우장춘은 어렵게 자라났다. 고아원에 맡겨진 적도 있다. 일본인 어머니의 희생이 컸다. 대학을 마치고 일본 농림성에 취직했다. 그는 일본이 주목하고 아끼는 육종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창씨 개명과 일본 국적 취득을 거부하였다.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대한민국 정부는 우장춘의 귀국을 적극 추진하였다. 우장춘은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대한민국 농업 발전을 위하여 평생을 몸 바쳐 일했다.‘하나님의 뜻’을 알아간다는 것은 가치관, 역사 의식, 민족의식, 직업관과 경제관을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울도 왕이었고 다윗도 왕이었고 솔로몬도 왕이었다. 이 세 사람은 모두가 다 통일 왕국 이스라엘 시대의 왕이었다. 저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40년씩 왕위에 있었다. 우리는 저들 세 명의 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안다.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를 끝으로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하나님에 의해서 왕정 국가가 시작되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움 받을 때의 나이가 40살이었다. 하나님이 사울을 택하여 세우셨다. 그러나 사울 왕은 말년에 하나님을 떠났다. 하나님을 등졌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그 시대의 선지자 사무엘을 우습게 여겼다. 결국은 하나님도 사울 왕을 버리셨다. 사무엘 상은 31장이 마지막 장이다. 우리는 사무엘 상 31장에서 사울 왕의 죽음과 그의 세 아들, 세 왕자의 죽음의 장면을 기억한다. 저들의 죽음의 배후에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이 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역사의 주인이시다.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 순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으로 내 생각과 마음에 가득 가득 채워 나가야 한다.
우리가 요절처럼 기억하는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이 무엇인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이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가는 시금석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에서와 야곱은 언약의 조상 이삭의 쌍둥이 아들로 태어났다. 아브라함의 사랑 받는 쌍둥이 손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저들 형제의 앞날은 서로 너무나도 달랐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 나의 당대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 우선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 기도 생활 우선 순위의 첫째여야 할 것이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기를 기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구체적인 행동 강령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맞다. 기도라는 것은 행동으로 이어지고, 삶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만 한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삶에 구체적인 변화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런 기도는 나무를 깎아 만들고 돌을 다듬어 만든 우상 앞에 비는 것과 별 차이가 없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기도 내용은 구체적이다. “하나님.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유명 연예인의 부인이 산후 체증 증가로 90Kg까지 나가던 체중을 꾸준히 관리해서 30kg을 감량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하루 이틀 연습한다고 42195미터의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겠는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구체적인 지침이 무엇인가. ‘합당하게’라는 말은 “칭찬 받을 만하게, 경건하게”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께 합당하게 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바울의 기도 내용은 구체적이다.
첫째, 범사에 주를 기쁘시게 하게 해 주세요.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 나의 주장, 나의 고집, 나의 취향, 나의 경험을 내려놓고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야만 할 것이다.
여름 반찬거리 중에 값도 싸고 건강에도 좋은 것이 많다. 어떤 반찬거리는 강력한 항산화, 혈관 건강, 콜레스테롤 조절, 항암, 혈당 조절, 체중 관리, 다이어트, 장 건강 개선, 눈 건강 개선에 골고루 도움이 된다. 껍질이 보라색이다. 안토시아닌, 식이 섬유, 비타민, 미네랄이 풍성하게 함유되어 있다. 반드시 익혀서 먹어야 한다. 이 야채의 이름이 무엇일까. 가지다. 물론 알러지가 있어서 못 먹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꼭 비싼 반찬거리여야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평범한 먹거리를 계절에 맞게 섭취하는 것이 건강의 제 일 조건이다.
이처럼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균형 있게 신구약의 말씀을 꾸준히 골고루 섭취하며 그 말씀 안에서 주께 합당하게 행하며 범사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행복과 보람과 만족과 기쁨과 위로와 안식이 차고 넘치게 될 것이다.
둘째,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해 주세요.
선한 일에도 열매가 있고 악한 일에도 결과가 있다. 문제는 선택이다. 선한 일을 꾸준히 계속하다가 보면 그 선한 열매가 풍성하게 될 것이다. 선한 일에 열매를 맺으려면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야 한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라고 하였다.
요즘 통일교 관련 뉴스가 자주 나온다. 가평군 설악면 장락산 중턱에 백악관보다 더 화려하고 더 웅장해 보이는 건물이 늘 궁금하였다. 천정궁이라고 불리는 통일교 본부가 압수 수색을 당했다. 통일교를 신봉하는 청년들이 비를 맞으며 경찰 차를 막아 사고 노래하며 함성을 지르며 울며 기도했다. 저들 젊은이들의 티셔츠 잔등에는‘홀리마더 한’이라고 써 있었다. 거룩한 어머니 한씨가 누굴까. 한학자(韓鶴子, 1943- )를 말한다. 한학자는 문선명(文鮮明, 1920-2012)의 부인이다. 저들은 총재라고 부른다.‘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이다. 우리가 통일교라고 부르는 세계적인 시이비 종교 단체의 공식 명칭이다. 한학자 총재는 올해 82세이다. 종교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특히나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에 빠지면 자신도 망하고 가정도 망하고 모든게 꼬이고 망하게 되고 만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께 합당하게 사는 길일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범사에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일일까. 예수께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7:16)라고 말씀하셨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마7:19)라고 하셨다.“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하셨다.
우리는 헐몬산 새벽 기도회 마지막 날 새벽에 기생 라합의 믿음에 대하여 묵상하였다. 우리 성경에 점잖게 해석해서 기생이지 원래는 창녀라고 해석해야 맞다. 영어 성경에는 그렇게 번역되어 있다.‘prostitute’라고 했다.‘매춘부, 창녀’라는 뜻이다. 그런데 매춘하며 여리고 성벽에 붙어 있는 집에서 부모와 형제자매와 살던 라합이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 중의 한 사람과 나중에 결혼하였다. 그는 지난 날의 몸을 팔던 생활을청산하였다. 새로운 미래를 꿈 꾸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는 말씀 그대로이다. 창녀 라합이 여리고 성 정탐꾼 라합의 아내가 되었다. 보아스를 낳았다. 보아스는 모압 여인으로 홀로 된 룻을 통해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마태복음 1장 5-6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의 족보에도 실려 있다.
하나님은 신분을 묻지 않으신다. 처지와 입장과 여건과 과거를 묻지 않읏힌다. 하나님은 지금 내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께 합당하게 살아가느냐를 물으신다. 범사에 주를 기쁘시게 하려 하며 살아가고 있느냐를 물으신다. 모든 선한 일에 열매 맺기를 원하고 있느냐를 물으신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대이며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의 여정이다. 믿음의 사람은 달라야 한다. 생각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행실이 다르고 매사에 뭔가 달라야 한다. 되는대로 살면 안된다. 막 살면 안된다. 그럭 저럭 살면 안된다. “어떻게 하다 보면 잘 되겠지”라는 요행심리(僥倖心理)를 갖고 살아서도 안된다. 僥(요, 바라다), 倖(행, 간사하다) 이 두 글자가 합쳐진 것이다. 간사한 마음으로 무엇을 바라면 안된단 말이다.
심은대로 거둔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 예수께서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8)라고 교훈해 주셨다. 주께 합당하게 살아가기를 기도하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 21, 23)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께 칭찬 받을 만한 삶을 살아가자. 사도 바울의 기도는 11절에도 계속된다.
셋째,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요즘 에스겔서를 새벽 묵상으로 시작했다. 우상숭배와 탐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바벨론에 끌려 갔다. 하나님은 바베론의 그발강 가에 끌려간 제사장의 아들 에스겔에게 말씀하셨다. 남 유다와 예루살렘 성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몇 년 세월이 지나고 주전 586년 남유다는 망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도성,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민족이 되고 말았다.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바벨론 포로의 땅에서 되돌아 오기 까지에는 긴긴 세월이 흘러 가야 했다. 지리적으로 어디에 사느냐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내가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힘을 따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능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겸허함이 있느냐는 것이다.
내 능력, 내 경험, 내 소양, 내 실력, 내 모든 것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교만한 것이다.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거룩함에 있다. 이단과 사이비의 교주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광’이란 몇 년 후면 끝날 정치 권력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힘을 따라 그 능력으로 능하게 하심을 원하고 바라고 소망하며 살 줄 알아야 한다.
넷째, 기쁨으로 모든 것을 견디고 오래 참게 해 주세요.
지금 그 어떤 고난을 겪을 지라도 참고 견뎌 내야 한다. 오늘 그 어떤 슬픔, 그 어떤 억울함, 그 어떤 답답한 일을 겪을지라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믿고 소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기쁨을 잃지 말고 주를 향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이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이런 은혜와 돌보심과 이끄심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성도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하기를 기도.
생각하여 보라. 골로새 교인들은 이방인들이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다. 할례 민족이 아니다. 언약 자손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들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셨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의 은혜를 입게 하셨다. 죄 사함의 은총을 덧입게 하셨다. 빛 가운데 살아가게 하셨다. 성도의 기업을 누리게 해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한 자답게 하나님 아버지께 항상 감사하며, 감사 기도를 드리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광야에서 40년 고생하던 백성들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것처럼 우리는 소망이 없던 이스라엘 밖에 있는 외인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이다. 히브리서 9장 15절에 보면,“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길 다가다록 나와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이런 은혜의 찬송을 부르며 상속자의 영광스러운 기업을 누리며 살아가는 감사와 기도가 계속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