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사66:10-14) 2025. 7. 6 맥추감사주일
맥추감사주일이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출23:16)라고 하였다. 성경이 말씀하는 절기는 3가지이다.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인 추수감사절이다. 절기는 지켜도 그만 지키지 않아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출23:14)라고 하였다. 출애굽기 5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을 애굽 왕 바로에게 보내셨다. 그리고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출5:1)라고 말하라고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430년동안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 백성들을 하나님께 제사하고,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는 민족으로 삼으시려고 출애굽의 선물을 주셨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바탕은 제사 생활 즉 예배 생활이다. 날마다 예배하고 주일마다 예배하고 달마다 예배하고 절기마다 예배하고 늘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의 바탕이다.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라고 말씀하셨다. 찬송한다는 것은 예배드린다는 뜻이다. 그렇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늘 예배하는 것이 삶의 제 일 순위여야 한다. 예배란 자신이 누구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발견하고 고백하는 일상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맥추절인 오늘 이사야 66장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한다. 이사야서는 66장 분량의 방대한 예언서이다. 하나님은 주전 8세기경에 남 유다에서 생활하던 청년 이사야를 부르셔서 60여년 동안 예언하게 하셨다. 이사야란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심판 예고와 남은 자의 구원과 구원 받은 자가 누릴 나중 영광에 대한 말씀을 방대한 분량으로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게 하신 모든 말씀들이 백년 그리고 백 오십여년이 지난 후에 모두 다 이루어지게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가감이 없이 이루어 진다. 일점 일획이라도 더하거나 빼면 않된다. 성경에는 권선징악의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그러한 내용들은 이사야 서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거짓과 악을 미워하신다. 죄를 경계하신다. 반면에 하나님은 선과 공의와 진리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은 진선미의 근원이시다. 어제 새벽에 부른 찬양 <나는 길 잃은 나그네 였네>의 가사 후렴에 보면“진실로 선함과 그 인자하심이 날마다 함께 하시리라”라는 고백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 맞다. 그렇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진실하시고 인자하신 전능자이시다.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
생각하여 보라. 누가 노예 생활을 원하겠나. 누가 가난을 선택하겠나. 누가 병약한 생활을 좋아하겠나. 그러나 살다보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지진이나 홍수나 큰 불이나 가뭄이나 전염병등으로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수 많은 이웃들이 죽기도 한다. 그런 불행과 위혐과 슬픔과 충격 속에서 살아 남은 자들이 새롭게 고난과 폐허를 딛고 일어나는 것이 삶인 것이다.
그렇지 않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애굽의 노예였다. 그랬던 저들을 하나님께서 광야로 출애굽하게 하셨다. 광야 생활 40년의 중심에 모세가 있었다. 광야 생활 중심이 성막을 건설하게 하셨다. 성막 중심의 제사 민족으로 연단하시고 이끄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계명과 율례와 법도와 규례의 말씀을 주셨다. 우리가 아는 십계명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근본 신앙이 십계명 안에 다 담겨 있다.
오대양 육대주에는 나라마다, 민족마다 저들만의 고유한 먹을거리가 넘쳐 난다. 물론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나라와 민족도 없지 않지만 말이다. 하나님은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핍절하게 살고 병약하게 살고 고난 중에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나리라”(요7:37-38)라고 약속해 주셨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9)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 성령 받아야 한다. 은혜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깨달아 알고 믿어야 한다. 그래야 각 사람의 인생사에 생수의 강이 넘쳐 나는 풍성한 은혜의 삶을 누리며 전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 66장은 최후 회복의 내용을 담고 있다. 장엄한 회복의 감격과 그 영광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날을 고대한다. 그렇지 않나. 우리 모두는 경제적으로 회복되고, 건강이 회복되고, 관계가 회복되고, 삶의 질이 회복되고 질서가 회복되고 감사가 회복되고 찬양이 회복되고 기쁨이 회복되기를 바라고 소망하며 살아간다.
오늘 말씀의 시작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라고 초청하고 있다. 요즘 우리가 자주 부르는 <비 준비하시니>라는 찬양의 가사 중에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네 하나님을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가며 주 임재 앞에 경배해”라고 찬송하지 않나.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이런 은혜가 임하기를 바란다. 자, 그러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무슨 회복의 은혜를 말씀하고 계신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사야의 예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의 고난을 겪은 민족이다. 왜 그런 고난의 날을 지내야 했는가. 하나님의 미움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이 우상 숭배와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제대로 잘 믿고 섬기고 따르는 민족으로 삼으시려고 바벨론을 풀무처럼 사용하신 것이다. 앗수르와 바벨론을 인생 막대기와 채찍으로 삼으셔서 언약 민족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연단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솔로몬 40년을 끝으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어 졌다. 세월이 흘러 갔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했다.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망했다. 누가 망하는 날을 원했겠나. 이사야서의 많은 분량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망한다는 경고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고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롯의 두 사위들은 두 천사를 통한 심판 예고를 농담으로 여겼다. 결국은 저들은 소돔 성에 남고 말았다. 천사에게서 전해 들은 심판의 말을 전하는 장인 롯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롯의 아내 조차도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뒤를 돌아 보았다.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다.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부부라도, 부모와 자식 사이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의 타락상을 이사야서 65장에서 까지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지적하신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쁨을 거두어 가실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우므로 노래할 것이로되 너희는 마음이 슬프므로 울며 심령이 상하므로 통곡할 것이라”(사65:13-14라고 엄하게 말씀하셨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이사야 66장 10절의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교회도 사랑하고 목회자도 사랑하고 성도들 간에도 서로 사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증거와 열매가 무엇인가.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 하라
지금 슬퍼하는 그 누구일지라도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라고 명하고 초청하고 있다. 기쁨과 즐거움을 네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
왜 누군가에게는 예루살렘이 슬픔의 도성이 되었는가.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제사하던 솔로몬의 성전이 우뚝 서 있던 거룩한 도성이었다. 그런데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불 바다가 되었다. 잿 더미가 되었다. 왕궁이 불타고 백성들의 가옥이 불탔다.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었다. 성전 안에 있던 금그릇을 다 빼앗아 갔다. 성전의 두 놋 기둥, 야긴과 보아스까지 다 끌어 가 버렸다. 폐허가 되었다. 남 유다의 마지막 임금 시드기야는 한 밤중에 성 밖의 여리고 평지로 도망가다가 붙잡혔다. 쇠고랑에 묶였다. 왕이 보는 앞에서 왕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바벨론의 군대는 시드기야 왕의 두 눈을 뽑았다. 시드기야 왕의 얼굴은 피 범벅이 되었다. 놋 사슬에 결박된채로 바벨론으로 끌려 갔다. 그 날은 시드기야가 왕이 된지 12년째 되던 넷째 달 구일이었다. 열왕기 하 25장 1- 7절에 기록된 내용이다.
왕의 시작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왕의 하루 하루 그리고 왕의 나중은 더 중요한 것이다. 우상 숭배하면 안된다. 세상 의지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세상 낙과 세상의 부귀영화와 인기와 명예와 권세와 자랑은 세월이 흐르다 보면 썩은 지푸라기와 같은 것이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은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택하시고 부르셨다. 그러나 그러한 왕같은 제사장의 존귀와 영광을 지켜 살지 못하면 부끄러워 지고 만다. 기쁨이 떠나고 만다. 즐거움이 사라지고 만다.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라는 찬양의 고백이 날마다, 매 순간마다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이런 고백이 담긴 찬양과 기쁨과 즐거움의 삶을 지켜 누리며 살아가는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위로하는 품 안에서 만족해 하라.
이사야 66장 11절을 다 같이 한 번 더 읽자.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회복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과 안식과 위로를 젖을 빠는 아기가 엄마 품에서 누리는 위로와 안식으로 비유하고 있다. 13절에 보면,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라고 하였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 아기의 모습을 상상하여 보라. 이 세상 그 어디에 그보다 더한 안식과 위로와 평안이 있겠나. 하나님도 아셨다. 이 세상 천지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위로와 안식은 어린 아기가 엄마의 품에 안겨서 누리는 그런 평안과 위로와 안식인 것을 말이다.
점점 무더워지는 여름이지만 매순간마다 주 안에서 이런 평안과 위로와 안식이 경험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생만 지지리 하고 고통과 억압과 압제와 불안과 불행과 두려움과 질병과 슬픔과 염려에 갇혀서 지내기를 절대로 원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엄마 품에 안긴 아기와 같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위로와 안식과 평화가 가득한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넘치는 평강과 영광을 누리라.
하나님은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지고 세상낙에 취해서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만 찬양하고 경배하는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12절이 말씀하는 강 같은 평강, 넘치는 시내 같은 영광이란 스스로 얻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누릴 수 있는 선물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라고 말이다. “보라 내가......주리니”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라. 그렇다. 맞다. 모든 것이 내 수고 내 노력 내 열심히 얻는 것 같지만 아니다. 하나님이 헐몬의 이슬처럼 위에서 내려 주셔야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나라에 50년 전에 처음으로 복음성가란 것이 보급될 당시에 <내게 강 같은 평화>라는 찬양이 원조처럼 불렸다.
내게 강같은 평화
내가 바다 같은 사랑
내게 샘 솟는 기쁨
내게 반석 같은 믿음
내게 믿음 소망 사랑
그런 평화와 사랑과 기쁨이 넘치고 믿음이 가득해 지기를 소망하며 찬양했다. 고난 당하던 백성, 흩어 졌던 백성,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 갔던 백성들에게 꿈과 같은 순간이 찾아 왔다.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 오는 꿈 같은 날이 주어졌다.
지난날 남유다가 왜 바벨론에 망했나. 군대가 없었나. 칼과 창과 활과 방패와 말과 병거가 없었나. 왕이 없었나. 아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과 남 유다를 이방 민족 바벨론에 맡기시니 침략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불행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이방 땅에서 울며 통곡하며 회개한 남은 백성들과 그의 후손들에게 예루살렘에 되 돌아갈 날을 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벨론에서의 포로 회복의 순간이다.
하나님은 무너진 솔로몬 성전 터 위에 수룹바벨을 앞장 세운 백성들의 손을 통해서 다시 성전이 지어지게 하셨다. 약하게 흩어졌던 백성을 다시 힘이 있게 하셨다. 예루살렘에 다시 기쁨이 찾아 오고 즐거운 노래 소리가 들리게 하셨다. 강 같은 평강을 누리게 해 주셨다. 주변 나라들이 부러워할 만한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회복되게 해 주셨다. 11절 끝에 보니까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라고 약속해 주셨다. 14절에 보니까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라고 축복해 주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뼈’란 힘과 위세와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던 백성들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시되 뼈처럼 강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뼈의 권세가 연한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듯이 풍성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14절에 보니까 ‘여호와의 손’이 그렇개 해 주신다고 하였다. 여호와의 손이 그의 사랑하고 위로하는 종들에게 나타날 때에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처럼 만족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회복의 날을 12절은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영광 가운데 강림하시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평강을 꿈처럼 기쁘고 즐겁게 누리는 복된 나날이 되기를 축워한다. 이사야 66장은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11절, 12절, 18절, 19절에는 2번이나 반복해서 ‘나의 영광, 뭇 나라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이런 기쁨과 즐거움과 평강과 위로가 영광스럽게 임하시는 하나님이 앞에서 계속되기를 소망한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기와 같은 그런 위로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이사야 66장 19절과 22-23절에 보니까 회복된 백성들,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말씀이 성취되는 주인공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