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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따라 행하라(갈5:16-26) 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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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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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5-06-29 20:29 조회 6 댓글 0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5:16-26)         2025. 6. 29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강조 중의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에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성도들에게 자유를 선물로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깨달아 자유함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5장 1절의 강조이다. 5장 13절에 보면, 주어진 “그 자유로 하여금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라고 권면하였다. 그렇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런 우리가 그 주어진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고 방종하게 살아간다면 주님이 기뻐하시겠나. 그런 강조의 말씀과 더불어 이어서 권면한 말씀이 오늘의 본문이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라고 하였다. 그래야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할 수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언급한 대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 속에서 두 소욕이 대립하고 갈등한다. 로마서 7장 22-23절에 보면,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서로 싸운다고 하였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라고 하였다. 자, 그러면 성령을 따라 행하며 살아가려면 어떤 일상을 살아가야 할까.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라.

육체의 소욕이 무엇인가. 고단하면 쉬고 싶고, 졸리면 잠을 자고 싶고, 배가 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한 곳이 그립고 더우면 시원한 곳을 찾는 속성은 그 누구에게나 다 있다. 이런 정도의 욕망과 욕구는 정상적인 것이다. 문제는 그보다 훨씬 심각한 욕구들이 각 사람의 마음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몇 가지로 자세하게 나누어 교훈하였다. 

 

첫째는, 성적 타락이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을 말했다.

 

둘째는, 비 정상적인 인간 관계와 자기 감정 관리의 위기이다.

“원수 맺는 것, 사사건건 다툼을 유발하는 분쟁, 시기, 화내는 것, 당 짓는 것, 분열, 투기 즉 질투”등이다.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라고 한다. 주의력 부족, 충동성, 과잉행동을 특징으로 하는 신경발달장애를 일컫는 의학용어이다. 우리는 이런 증상이 어린 시절에만 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성인의 때까지 이어지는 확률이 50%에 이른다고 하니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는, 자기 관리의 무질서이다.

“술취함과 방탕함과”라고 하였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니까 “술주정과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대검찰청 마약·조직범죄부는 지난 6월 15일, <2024 마약류 범죄백서>를 발간했다. 지난해 단속된 마약류 사범은 2만 3022명이다. 2023년에는 2만 7611명이었다. 그나마 전년도 대비 16.6% 감소했다. 우리나라가 마약범 통계를 최초로 시작한 1985년도에는 마약사범 1190명이었다. 오늘 날은 약 20배 증가한 셈이다. 매년 평균 25,000여명이 마약 사범으로 단속을 받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온라인 마약 거래가 증가하면서 20·30세대의 젊은 세대의 마약사범 비율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지난 해 마약사범 중 20·30세대는 1만 3996명으로 전체의 60.8%를 차지했다. 예전에는 담배 중독, 술 중독이 심각한 문제였다면 오늘 날은 마약과의 전쟁을 벌여야 하는 위기의 시대를 맞고 있다. 

 

넷째는, 종교적인 타락이다.

“우상 숭배와 주술과 이단”이다. 주술이란 마술을 말한다. 

 

2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내용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급하면서 주의하도록 경계하였던 사실을 강조한다. 그렇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5장, 에베소서 4장, 데살로니가전서 4장 등에서 이와 같은 주제의 심각한 육체적 소욕을 인한 위협을 경계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위와 같은 내용의 특징이 무엇인가. 한결같이 사탄 마귀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성령이 원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소욕들이 아니다. 그렇지 않나.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하는 성도라면 어떻게 위와 같은 소욕으로 인하여 자신을 방임하겠는가. 물론 우리는 선한 행실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깨달아 알고 믿는 성도라면 세상을 어떤 태도,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는 명확한 것이 아닌가. 

자기 자신의 육체적인 욕망도 다스리고 대인관계의 불편한 감정의 표현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요즘은 전문 용어 중에 ‘행동 장애’라를 표현을 쓰지 않나. 어린이나 청소년만 행동 장애가 있는 것이 아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행동 장애가 다스려지지 않으면 정상적인 가족 관계가 이웃 관계를 유지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가 없는 법이다. 우상 숭배나 이단에 빠져드는 심각성은 더 말한 것조차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라.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것이 소극적인 태도라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적극적인 자세이다. 육체의 소욕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율법과 할례 만으로는 의로워 질 수 없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라고 하였다. 그렇다. 복음을 믿는 성도라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을 따라서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1절 이하에서 하갈을 통한 이스마엘의 탄생과 사라를 통한 이삭의 탄생을 예로 든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이 낳았고 이삭도 아브라함이 낳았다. 그러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태어난 것이다. 반면에 사라을 통해서 태어난 아들 이삭의 탄생은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설교자의 설명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설명이다. 바울은 이 비유의 끝에 선언한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갈4:31)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이 그러하여야 한다는 교훈이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이 낳았고 이삭도 아브라함이 낳았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판단과 아내 사라의 조급한 요구를 받아 들인 육체적인 욕망으로 인한 탄생이었다. 그러나 이삭의 탄생은 달랐다.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서 하나님의 때가 되어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나이 90세가 된 아내 사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이다.

 

성령으로 인한 삶이 그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육체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서 점점 멀어지고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리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열매를 맺게 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분명하게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2-14)

 

그렇다. 육신의 욕망대로 살면 그 나중은 죽음 뿐이다.“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라고 하였다. 이 본문을 <현대인의 성경>에서 읽으면“욕심이 생기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라고 하였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인생의 끝은 불행한 멸망이다. 무서운 심판이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 성도라면 마땅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야만 한다.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이제 하루 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나 이제 주를 따라 가려네

나 이제 주를 따라 가려네

세상 죄를 버리고 생명 길을 찾았네

나 이제 주를 따라 가려네

 

나 이제 성령 따라 가려네

나 이제 성령 따라 가려네

세상 죄를 버리고 생명 길을 찾았네

나 이제 주를 따라 가려네

 

 

열매로 대답하라.

요즘 채소와 과일을 파는 상점 앞을 지나면서 보면 길거리에까지 엄청난 양의 채소와 과일을 쌓아 놓고 판다. 별의 별 채소, 별의 별 과일들이 넘쳐 난다. 그 모든 채소, 그 다양한 과일들이 저절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농부가 정성을 다해서 심고 물주고 가꾼 결실들이다. 그렇지 않나. 무, 배추, 감자, 고구마, 상추, 시금치, 고추, 마늘, 오이, 가지, 버섯, 들깨 이파리, 당근, 우엉, 근대, 미나리, 쑥갓, 파프리카,  그 무엇 하나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나. 과일은 어떤가. 사과, 배, 복숭아, 감, 밤, 대추, 자두, 살구, 포도, 수박, 참외, 딸기, 멜론, 블루베리, 바나나, 파인애플, 망고, 키위, 체리, 두리안 등등 등등 그 무엇 하나 쉽게 열매 맺을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나. 과수원 지기와 농부의 땀과 수고와 정성이 깃들어서 틈실한 결실을 하나님의 선물로 수확하는 것이 아닌가.

 

성령의 열매도 마찬가지다. 잠깐동안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해서 맺히는 열매가 아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매순간, 날마다, 달마다, 평생토록 살아가야 할 과제인 것이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무엇인가. 

 

첫째, 사랑, 희락, 화평은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게 해 주시는 열매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사랑은 남녀간의 연애하는 사랑, 친구 간의 우정, 형제나 동족 간의 사랑 정도를 말씀하는 사랑이 아니다. 이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보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말씀하는 것이다. 희락(喜樂)이란 기쁨인데 이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베풀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성령을 따라 살아가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삶의 활기를 말한다. 세상 그 무슨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성령 안에서의 기쁨 그것이 ‘희락’이란 성령의 열매이다. 화평(和平)이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상태에서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화목하게 하신 열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화해의 결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룩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 화평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이 이웃과의 사이에 그 화평을 계속 누려 나갈 때에 경험되는 성령 안에서의 신령한 열매인 것이다. 

 

둘째,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이다. 이는 나와 상대방의 사이에서 맺는 성령의 열매이다. 

 

생각하여 보라. 여기서 말씀하는 오래 참음이란 나 자신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어떤 감정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그런 정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가족, 나와 이웃,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마음가짐과 믿음을 일컫는다. 불의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평온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세를 말한다. 이는 단순히 나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그 어떤 경우, 그 어떤 상대방에 대하여 참고 견뎌내는 속성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래 단어의 뜻은 ‘긴 마음’이란 표현이다. 마음이 길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가 그 무슨 일이든지 마음이 조급하고 생각이 짧아서 그르치는 일이나 인간 관계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사랑은 길이 길이 오래 오래 참아주시는 사랑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의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절인 3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라고 언급한 후에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을 전해 주었다. 거기서 말씀하는 사랑은 세상적은 그 어떤 사랑을 말씀하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사랑,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아가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 사랑의 정의의 정점이 무엇인가. “사랑은 오래 참고....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 7) 맞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오래 참는 것은 성령의 열매 중의 열매인 것이다. 

 

자비와 양선은 어떤가. 자비(慈悲)는 “남에 대하여 인자하고 사랑스럽고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사도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에서 자비를 인자(仁慈) 혹은 선(善)으로 표현하였다. 양선(良善)이란 사도 바울만이 사용하는 신약 성경의 유일한 표현이다. 양선이란 “자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행위”를 말씀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에‘선한 사마리아 시람의 비유’가 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된 사람이 있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냥 보고 지나갔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이 그 현장을 보고 짐승에서 내려서 그를 치료해 주었다. 짐승에 태워서 여관에 데리고 갔다. 밤을 새워서 그를 보살폈다. 여관 주인에게 다음 날 아침에 부탁했다. 돌아오는 길에 치료비를 전담하겠다고 약속했다.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그림 중에 바로 그 비유의 내용을 담은 그림이 전해져 온다. 양선이란 자비의 열매보다 더 적극적인 성령의 열매이다. 자비심을 갖는 것도 좋고 필요하다. 그러나 자비심을 가지고 불쌍한 이웃, 나의 손길이 필요한 그 누군가를 돌보고 섬기는 것이 양선이다. 오래 참는 것과 자비와 양선은 하나님 안에서 내 주변의 그 누군가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실천하는 성령의 열매이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생각에 국한되는 그 무엇이 아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일상생활에 증거로 주어지는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마지막은,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내가 내 자신 안에서 추구하며 열매 맺는 성령의 열매이다. 

 

충성(忠誠)이란 원래의 단어는 믿음이란 단어와 같은‘피스티스’( πίστις)이다. 이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신실한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구분하면 자기 자신에게 신실하지 못하면 구 누군가에게도 신실할 수 없는 법이다. 내가 내 자신에게 충성되고 신실해야만 이웃과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이란 열매는 내가 내 마음 속에 먼저 열매 맺어야만 하는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온유(溫柔)란 완고한 것의 반대의 모습을 말한다. 우리가 주변 사람에게 상냥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내가 내 자신의 성품 속에 온유함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온유한 척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기만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그 어느 누구에게든지 온유한 척 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을 사셨다. 그러므로 온유함이란 성령의 열매로서 내가 내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 받는 신앙의 성숙을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팔복 말씀에서“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라고 교훈해 주셨다. 온유함과 겸손함은 하나다. 예수께서는“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라고 예수님의 품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 그러므로 충성되고 온유하고 겸손하려면 진실하시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께 배워야 한다. 주님이 말씀하신 멍에를 메고 주님께로부터 매 순간 배우고 또 배우려 해야만 한다. 

 

또 하나는 절제(節制)의 열매이다. 매사에 스스로 자제하는 능력이 절제이다. 이는 헬라 스토아 철학의 기본 바탕이기도 하였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육체의 욕망을 다스리리면 반드시 절제의 은사와 열매가 필요한 것을 강조하였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5)라고 하였다. 

 

사회적인 저명인사나 지도층 인사들이 부끄럽게 무너지고 불명예스럽게 추락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나.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성도는 매사에  절제해야만 한다. 크고 작은 일들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절제하여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정과 욕심을 매 순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수련을 계속해 나가야만 한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갈라디아서 5장 25-26절을 이렇게 번역해 주었다.

 

 “만일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산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난 체하지 말고 서로 다투거나 미워하지 맙시다.”

 

믿음의 사람은 모든 육체적인 충동과 욕망과 욕구 앞에서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신다. 그래야 상급을 받을 수 있다. 그래야 성령이 기뻐하신다. 그래야 점점 열매가 풍성한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절제는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의 열매를 감싸 안는 보자기와 같은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따라서 절제의 열매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이 헛되고 말 것이다. 점점 무더워지는 계절이 시작되었다. 시작될 헐몬산 새벽 기도회와 더불어 찬양과 말씀 묵상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는 기도와 전도를 생활화하는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나날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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