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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 예수사랑교회
속량(贖良) 받은 자들(사35:1-10) 20251214

본문

                     속량(贖良) 받은 자들(사35:1-10)         2025. 12. 14




강림절기는 회복의 은혜를 노래하고 찬양하는 절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순간이 찾아오기를 고대하고 또 고대하였다. 그렇지 않나.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삶의 회복을 원한다. 질병,  가난, 우울, 불안, 슬픔, 고통, 억압, 결박 등에서 벗어나서 회복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 건강, 풍요, 기쁨, 평안, 자유, 만족, 보람, 행복한 삶을 원한다. 회복에 대한 기대나 소원이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이는 다른 말로 말하면 인간은 누구나 다 결핍 가운데 살아간다는 말이다. 에덴은 완전한 창조의 동산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에덴은 더 이상 에덴일 수 없었다. 에덴에 여전히 하나님이 계셨지만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고 타락한 이후의 에덴은 더 이상 타락 이전의 에덴이 아니었다.


죄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죄가 확정되면 가두는 곳이 있다. 감옥에는 자유가 없다. 무기 징역형을 받으면 평생을 감옥에 갇혀서 지내야 한다. 그처럼 인간이 죄를 짓고 나면 자기 자신이 그 죄의 사슬에 매여 살게 된다. 옛 말에 “맞은 놈은 다리를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다리를 욺쿠리고 잔다”는 말이 있다. 지은 죄 자체가 인간을 결박한다는 의미이다. 성탄은 죄 가운데 갇혀 있던 인간을 죄로부터 풀어내어 자유하게 하고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영광을 선물로 회복시켜 주는 절기이다. 이 진리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보냄을 받은 목적이 이것이다. 물론 이사야를 통한 예언은 장차 포로의 땅에서 돌아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 맞다. 70년 바벨론 포로의 땅에서 풀려나서 유다 땅으로 돌아오고, 예루살렘 성으로 되 돌아오는 날이 기쁨의 날이요 영광의 날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사야 35장이 말씀하는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란 그 정도의 기쁨과 그 정도의 즐거움의 날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과 하나님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보게 될 날을 예언한 말씀이다. 완전하고 영원한 회복을 약속한 말씀이다. 


이사야는 66장 분량의 방대한 예언서이다. 이사야는 세 부분으로 나눈다. 36-39장, 그리고 40-66장으로 구분한다. 그 중의 첫 번 분량이 1장으로 35장까지이다. 그 긴 분량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악한 자에 대한 심판과 남은 자에 대한 회복의 약속”을 담고 있다. 그렇지 않나. 오늘 읽은 이사야 35장은 그 내용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글을 겨우 읽는 어린아이라도 이사야 35장의 내용은 회복을 주제로 한 내용인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회복의 결과는 8절 이하에 그림처럼 약속되어 있다.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갈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거기 거룩한 그 길에 검은 구름 없으니

낮과 같이 맑고 밝은 거룩한 길 다니리”


라고 찬송하지 않나. <황무지가 장미 꽃 같이>라는 242장 찬송가의 후렴이다. 그 찬송가의 제목 아래에 보면 이사야 35장 6절 말씀이 적혀 있다. “이는 광야에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라는 말씀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그런 세상을 꿈 꾼다. 그런 삶을 소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별의 별 우여곡절을 다 겪으며 살아간다. 죄 많은 이 세상은 광야와 같고 메마른 땅과 같다. 그런데 주님은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라고 약속 해 주신 것이다.


본문을 자세히 보라. 거룩한 길이라고 일컬어 지게 될 그길, 대로로  다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8절 이하에 보니까.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한다고 했다. 즉 깨끗함을 입은 자만이 지나갈 수 있다고 하였다.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길이라고 하였다.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라고 하였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아무리 우매한 행인이라도 그 길을 찾기가 쉬워서 방황하지 않을 것이며”라는 뜻이다. 우리 말 해석이 애매할 뿐이다. 이는“‘내가  길이요’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그 복음의 길을 따라서 살아가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축복의 약속의 말씀인 것이다. 


또한 그 길은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않는 안전한 길”이라고 하였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보호자가 되셔서 그 어떤 대적이나 방해물이라도 막아 주시고 차단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인 것이다. 로마서 8장 31절 이하의 말씀이 생각 나지 않나.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1-32, 37)


그 중간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라고 선포하였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를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깨닫고 영접하고 주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를 대적할 수 있는 힘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거기에 있는 대로인 거룩한 길을 걸어 가는 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게 되는 것이다. 8, 9, 10절에 세 번이나 반복되는 강조가 무엇인가. 그 거룩한 대로를 걷는 이들은 “오직 구속(救贖)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길이며, 오직 구속(救贖)함을 받은 자만이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贖良)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 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 길은 “노래하며 돌아 오는 길이며, 시온에 이르는 길이며, 거룩한 그 길인 대로로 걷는 자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 길이라” 라고 하였다. 그 길은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는 길”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약속의 말씀은 허망한 약속, 헛된 약속, 착각하게 하는 약속, 허영에 사로잡히게 하는 맹목적인 약속이 결코 아니다. 만약에 이와 같은 약속이 거짓된 약속이라면 하나님도 거짓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도 거짓되고 성령의 강림도 거짓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기독교는 그런 거짓된 종교가 아니다. 우리가 알고 믿는 신앙은 이단이나 사이비의 미혹에 빠져 드는 것처럼 그런 어리석은 유혹에 빠져 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저 지난 주 수요일 밤 예배 시간의 본문이었던 디모데 전서 4장 1절에 보면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라고 경고하였다. 그런 자들은“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라고 지적하였다. 

자. 그러면 구속함을 받고,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누리는 은혜가 무엇인가. 



자연의 회복.

이는 만물의 회복을 말씀한다. 스스로에게 질문하여 보라. 자신의 인생길이 광야와 메마른 땅과 사막과 같은 인생길이 되길 원하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7절 말씀처럼 ‘승냥이가 눕는’땅, 즉 맹수와 들짐승이 우글거라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 가기를 원하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좋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구속의 은혜를 입고 대속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딸된 성도들이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 하기를” 원하신다. “백합화가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라고 약속해 주셨다. 


일제 시대의 민족 저항 시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시인 이상화(1901-1943)의 시 중에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있다. 대구 출신의 시인이요 독립 운동가였던 그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3년에 눈을 감았다. 21살때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프랑스 어학원에서 공부하며 프랑스 유학을 꿈꾸던 문학 청년이었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그의 꿈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읊는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 조차 빼앗기겠네” 


이사야서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가득차 있다. 넘쳐 난다. 요즘 우리는 여호수아서를 묵상해 가고 있다. 광야 40년의 모세 시대를 뒤로 하고 요단을 건너 여리고성 함락으로부터 시작된 여호수아 시대의 가나안 점령 전쟁의 과정를 묵상해 나가고 있다. 그렇게 정착한 땅, 그렇게 선물로 주어진 꿈 같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였다. 하나님을 떠났다. 결국은 바벨론의 포로 시기를 겪어야 했다. 구약 성경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이사야서가 주는 교훈도 명확하다. 하나님을 떠난 민족은 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숭배하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을 그냥  두지 않으신다. 가시채와 막대기의 고통과 연단을 거쳐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개인과 민족이 되길 원하신다. 이사야서에 가득찬 교훈이 그런 내용들이다. 

가령 이사야 34장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심판하시는 경고의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이사야 34장 2절에 보면, “대저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군을 항하여 분내사 그들을 진멸하시며 살육당하게 하셨은즉”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하나님이 분을 내시면 인생길이 순식간에 광야길과 메마른 땅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가 임하고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면 순식간에 기쁨과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보는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답답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매 순간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깨우쳐 주시는 이와 같은 회복의 은혜를 소망하며 누리며 살아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생각하여 보라. 에덴은 아름다운 동산, 완전한 동산, 하나님이 거니시는 동산이었다. 그러나 불순종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가리고 동산 나무숲 사이에 숨고 말았다. 더 이상 에덴동산이 아름답게 느껴지질 않았다. 일순간에 저들 부부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엄습하게 되었다. 창세기 3장 10절에 보면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하였다. 왜 두려움이 찾아 왔는가. 왜 두려움이 엄습하게 되었는가. 하나님을 떠나면 두려워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두려워 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두려워지는 것이다. 신앙 생활의 회복이란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전날의 한 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라고 찬송하지 않나. 그렇다. 이것이 대속 받은 자의 노래요 속량 받은 자의 찬송인 것이다. 이런 은혜의 절기, 이와 같은 강림절기의 찬송이 계속되길 축원한다. 



인간의 회복.

인간은 누구나 회복을 꿈꾸며 살아간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지금 비록 절망과 고통과 좌절 가운데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장차 임하게 될 완전한 회복의 날을 꿈 꾸며 소망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주 안에서 맞이할 영광스러운 장래의 순간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 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사35:3-4)라고 약속해 주셨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약한 손으로 살기를 원하겠나. 누가 떨리는 무릎으로 지내길 원하겠나. 누가 두려웜에 떨며 지내길 원하겠냐 말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부모라면 누가 내 아들딸이 세상을 약한 손과 떨리는 무릎으로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기를 원하겠는가.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는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아들딸을 격려하듯이 말씀하신다.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라.

떨리는 무릎을 굳가 하여라.

겁내지 말고 굳세어라.

두려워 하지 말아라.

너희 하나님이 오셔서 보복해 주실 것이다. 원수를 물리쳐 주실 것이다. 대적자의 위협과 압제로부터 너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


라고 약속해 주고 계시다. 지난 주일 예배 시간에 우리는 <보라 너희는 두려워 말고>라는 찬양을 다 같이 불렀다. 그 가사가 무엇인가.


보라 너희는 두려워 말고

보라 너희를 인도한 나를

보라 너희는 지치지 말고

보라 너희를 구원한 나를

너희를 치던 적은 어디 있느냐

너희를 억누르던 원수는 어디 있느냐

보라 하나님 구원을

보라 하나님 능력을

너희를 위해서 싸우시는

주의 손을 보라


이런 담대한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과 늘 동행하는 은혜의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우리를 구하러 오시는 하나님.

성탄은 기쁨의 절기이다. 성탄은 즐거움을 절기이다. 왜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저를 믿는 자들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게 하시려고 아들 예수를 이 땅에 선물로 보내 주신 날이니 기쁘고 즐거운 날인 것이다. 다른 선물 못 받아도 기쁜 날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성탄절의 가장 큰 선물이기 때문이다.


구원이 선물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라고 하였다. 


5절이 말씀하는 ‘그 때에’란 어떤 때를 말씀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주님은 가시는 곳마다에서 각색 병자를 고쳐 주셨다.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새사람으로 살아가게 해 주셨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회복되었다. 이사야 35장 5-6절의 말씀 그대로의 일들이 벌어졌다.


맹인의 눈이 밝아졌다.

못 듣던 사람의 귀가 열렸다.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뛰는 기적이 벌어졌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말 못하던 자의 혀가 풀려서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들이 처처에서 벌어졌다. 7절의 ‘뜨거운 사막’이란 신기루를 말한다. 신기루가 변하여 물이 넘쳐 나는 못이 되었다.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되었다. 원천이 무엇인가. 생명샘의 근원을 말하지 않나. 승냥이와 같은 들짐승이 눕던 광야가 변하여 풀과 갈대와 부들이 무성한 회복의 땅이 되었다. 


예수님이 가시는 마을마다 도성마다 그런 회복의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나게 되었다. 주변을 보라. 자신을 보라. 예수 모르던 때의 나의 삶과 예수 믿기 시작한 이후의 나의 삶을 비교해 보라. 내 주변에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며 사는 믿음의 사람을 주목해 보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을 비교해 보라. 같은 아파트의 같은 평수의 같은 공간에 살아도 그 집에 누가 사느냐에 따라서 그 집안 공기가 달라진다. 


남북한의 야경을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왜 남한의 야경은 대낮과 같은데 휴전선 이북의 북한은 칠흑같이 어두운가. 복음의 힘이 그런 것이다. 과거의 평양은 서울보다 더 복음화되어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악의 중심이 되고 말았다. 이사야 33장 9절에 보면, “땅이 슬퍼하며 쇠잔하며 레바논이 부끄러워 하고 마르며 사론은 사막과 같이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도다”라고 경고하였다. 하나님을 떠나면 땅이라도 불행해진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면 자연이라도 신음하게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제대로 잘 믿는 사람의 얼굴에는 그런 은혜의 광채가 있다. 가난해도, 병약해도, 성공하고 출세하지 못했어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예수의 향기가 있다. 예수 믿는 자의 빛이 있다. 예수 믿는 자의 광채가 드러난다. 그러나 세상의 죄와 악에 찌들어서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에는 그런 평안함이나 그런 기쁨이나 그런 생기와 활력이 없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땐>이란 복음 성가의 가사가 무엇인가.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 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또 저기 서 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하였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 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거룩한 길을 가게 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구원의 기쁨과 속량 받은 자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아멘


예수사랑 조회 7회 2025-12-16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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