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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부활(고전15:35-49) 20250420 부활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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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5-04-23 00:17 조회 135 댓글 0
 

                   죽은 자의 부활(고전15:35-49)              2025. 4. 20 부활 주일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는 예수 부활의 역사가 담겨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던 자였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 체험 이후로 예수 부활을 이방에 전하는 사도 중의 사도가 되었다. 고린도전서 15장은‘부활장’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58절 분량의 모든 말씀이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다 읽지 못한 앞부분에는 부활의 확실성과 부활의 중요성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에 보면 예수의 부활을 이해하기 쉽게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이미 사도 바울 당시에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끝이지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이냐” 라고 부인하는 이들이 많았다. 영지주의자들이 그 대표적인 이단 세력들이었다. 

 

35절에 보면, 세상 사람들의 질문은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는,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 날 수 있느냐

둘째는, 다시 살아난다면 어떠한 몸으로 살아나느냐

라는 질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논리적인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하여 의심과 회의를 가지고 질문하려 하는 자들을 “어리석은자여”라고 공박하면서 대답을 이어간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려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도 모르고 자연의 이치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일갈(一喝)하고 있다. 누가복음 24장 38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날 밤에 숨어 있던 제자들을 찾아 가셨다. 그리고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라고 제자들을 책망하고 꾸짖으셨다. 사도 바울 또한 예수 부활을 못 믿는 어리석은 무리들에게  씨 뿌리는 비유와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의 예를 들면서 해와 달과 별들까지도 예로 들어가면서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 

 

40절에 보면,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다”라고 하였다.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다”라고 하였다. 

 

하늘에 속한 형체,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란 41절에서 말하는 해와 달과 별들의 세계인 태양계의 신비를 인용해서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42절에서 본격적으로 부활을 설명하고 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라는 도입부로부터 바울은 대단히 논리적인 방법으로 예수의 부활을 설명해 나가고 있다. 

 


 썩지 아니하는 부활.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라고 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썩는다. 썩지 않는 것이란 없다. 36절에 보면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라는 인용이 무슨 의미인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라고 하였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씨앗의 신비이다. 밀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밀을 열매 맺는다. 보리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보리를 열매 맺는다. 38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각 종자마다 그 형체를 열매로 맺게 하신다고 설명하였다.

 

예수의 부활이 그러하다. 부활은 인간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역이란 말이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12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설명하는 것이 그것이다. 만약에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부활이 헛것이고 우리가 부활을 믿는 믿음도 헛것이란 말이다. 또한 부활을 전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들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이란 말이다. 

 

19절에 보니까,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 없다면 없는 것을 있다고 믿고 사실로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는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와 같은 육체로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죽음이지만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신 것이다. 20절을 큰 소리로 읽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부활이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부활인 것이다. 이것인 성도의 축복이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인 것이다. 아담 안에서 육체를 가지도 태어난 인간의 육체는 모두가 다 썩을 것으로 심은 자들이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하였다. 우리는 고행이나 금욕이나 그 어떤 선한 행실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진리를 깨달아 알고 믿는 성도는 썩어질 육체의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는 자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주인 삼고 살아가는 자이다. 성도란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과 영생을 선물로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초청을 니고데모에게 하셨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라고 하였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라고 하였다. 그렇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우리는 더 이상 썩을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아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의 교훈이 무엇인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 말씀은 우리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고 첫 예배를 드리던 2013년 8월 18일, 그 주일 예배 시간에 묵상한 말씀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 신앙에서 자라나서 갈라디아 2장 20절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라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의 주인공 답게 살아가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성도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어야 한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20세기 기독교를 대표하던 영국의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최고 가치는 십자가 신앙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 예수의 기사와 이적, 예수의 귀신을 다스리는 능력,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 부활의 은혜가 다 귀하지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최고의 복음이라고 하였다. 부활을 부인하는 말씀이 아니다. 부활을 약화시키려는 주장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그 고난의 완전한 죽음이 있으므로 인해서 예수의 부활이 더욱 더 빛이 나기 때문이다. 

 

그는 온전한 제자의 8가지 특징을 교훈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죽음의 역설을 이해하기’이다. 그는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죽음의 역설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죽음이라는 은유를 통해 약함을 통한 능력, 고난을 통한 영광, 죽음을 통한 생명 등 그리스도인이 역설적인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렇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인간은 썩어질 것으로 심는 연약한 인생들이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썩지 않을 것으로 부활하고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덧입은 자들이다. 

 

 

영광스러운 부활.

42절에“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라고 하였다. 그렇다. 본래 인간의 모습은 죄와 악에 쉽게 오염되고 무너지는 연약한 인생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신 새 사람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인간은 육체 속에 갇혀 사는 동안에는 생각하는 것이 죄요 보는 것이 죄요 듣는 것이 죄요 말하는 모든 것이 죄다. 매 순간의 모든 것들이 죄와 악의 소굴에서 방황하며 살아간다. 

 

<주여 이 죄인이>라는 찬양 1절과 4절을 부르자. 

 

“1.세상에서 방황할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맘 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 를 저질렀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 받을수 있나요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 받을 수 있나요

 

4. 이 모든 죄 무거운 짐 이젠 모두 다 벗었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오

내주여 이 죄인이 무한 감사 드립니다

나의 몸과 영혼까지 주를 위해 바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죄와 악에 빠진 인생일지라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면 누구라도 욕된 것에서 벗어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딸의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그러하고, 출애굽기의 모세가 그러하지 않나.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만나 주지 않으셨다면 그는 아버지 데라의 대를 이어 우상을 섬기고 우상을 만들어 팔며 양과 염소와 소와 약대 틈에서 그렇게 살다가 끝날 인생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언약의 조상으로 택하셨다. 모세는 아브라함의 7대 후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을 보라. 지극히 평범한 인생들이 아니었나. 그러나 예수께서 저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다. 성령 받고 부활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평생토록 살아가도록 부르셨다. 순교자의 삶으로 인도하셨다.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만약에 사도 바울이 부활 복음을 부인하고 모르고 믿지 못하였다면 그는 율법에 갇혀서 살아가 그의 생을 끝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기가 등등하고 오히려 예수 믿는 이들을 색출해서 잡아다가 처형하려고 의기 냥냥하던 그를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셨다. 그가 타고 가던 짐승의 잔등에서 땅에 떨어지게 하셨다. “사울아 사울아”하고 부르셨다. 강한 빛을 비추셨다.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사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고 대답하셨다. 그의 눈을 삼일 동안 가리셨다. 삼 일동안 사울은 먹지도 않았다. 주님은 아나니아 선지자를 보내셔서 사울에게 안수하게 하셨다. 그 순간의 사울의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 다시 보게 되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다.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간해 졌다. 그 날로 사울은 다메섹 성안에 찾아 다니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만났다. 며칠간 머물렀다. 다메섹 성 안에 있는 여러 회당을 일일이 찾아 다녔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였다. 사도행전 9장 22절의 내용이다. 다메섹에 흩어져서 살아가던 유대인들은 사울의 변화를 알게 된 후에 모두가 다 당혹스러워 했다. 

 

주님은 예수의 부활 복음을 부인하고 핍박하던 사울로 하여금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존귀한 전도자가 되게 하셨다. 주님은 복음을 몰라 욕된 나날을 살던 사울을 택하셔서 영광스러운 부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셨다. 

 

 

강하고 신령한 몸의 부활.

42-43절에 보면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인간은 결코 강하지 않다 인간은 몹시 약하다. 사고와 사건과 질병과 전염병과 천재 지변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만다. 수조 혹은 수십조, 수백조의 재산을 가진 세계적인 기업가들이 자기 소유의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면 그런 길을 택했을 것이다. 억만금을 주고도 우리는 단 한 시간도 살 수 없고 단 하루의 생명도 연장할 수 없다. 물론 돈의 힘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건강과 보건을 지키고 노화를 조금 지연 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로병사의 길을 피할 인생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 어떤 영웅호걸 절세가인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공평한 것이다. 

 

불로초(不老草)를 찾아오라고 명령했다는 진시황(秦始皇, BC 259-210)도 49살에 죽고 말았다. 천하를 점령해 가던 알렉산더(Alexandros, BC 356-323)는 33살에 죽었다. 필립포스 2세의 아들로 페르시아 제국을 점령하고 마케도니아 군사력을 인도까지 진출시켰던 알렉산더이지만 그의 목숨은 제 맘대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마릴린 먼로(Marilin Monroe, 1926-1962)는 36살에 죽었다.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도 46살에 눈을 감아야 했다.

 

자랑하면 안된다. 교만한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은 결코 강하지 않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대로 인간은 약하고 부족하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신비와 영생의 비밀과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강한 것으로 살아나며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부활의 은혜를 덧입는 길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죽음은 생명을 이길 수 없다.

죽음을 죽일 수 있는 힘은 오직 생명의 힘, 부활과 영생의 권능이다.

사망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인생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사망은 권력, 명예, 부, 지식, 인기 등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그 어떤 무엇으로도 다스려지지 않는다. 사망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바울을 깨달아 알았다. 그러므로 44절에서“육의 몸이 있은즉 영의 몸도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에덴 동산의 첫 아담은 육의 몸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육의 몸을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 내어 주셨으나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장사지낸 무덤에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리셨다. 이것이 부활의 몸을 입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인 것이다. 부활하신 그의 몸에는 창자국과 못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하신 몸은 십자가 처형 이전의 몸과 다른 몸이었다. 47절에 보니까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라고 하였다. 

 

에덴의 첫 아담은 썩을 몸의 시조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신령한 몸을 입고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의 시조이시다. 요한복음 3장 13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 온 자”라고 설명해 주셨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육의 몸을 입고 태어나 살아가듯이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부활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약한 것으로 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자들이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자들이다.  

 

리랜드 스탠퍼드(Leland Stanford, 1824-1893)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8대 주지사와 39, 42대 상원의원을 지냈고 미국 동서횡단 철도 건설의 주인공인 큰 부자였다. 젊어서는 위스콘신 주의 변호사였다.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후에 광산 보급품과 잡화상을 큰 돈을 벌었다. 동서횡단 철도 건설 후에는 센트럴퍼시픽철도회를 설립하고 32년 동안 그 회사의 사장직을 맡았다. 그의 외아들이 유럽 여행 도중인 1884년에 장티프스로 갑자기 죽었다. 결혼 생활 18년만에 겨우 얻은 아들이었다. 잘 생긴 외모에 머리가 명석했던 15살된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 불행한 장례식을 마친 그 날 밤 꿈에 아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났다.“아빠 나는 하나님 곁에서 평안히 있었요. 저 대신에 이 땅의 청년들을 도와 주세요”라는 음성을 들었다. 스캔퍼드 씨는 그날 밤으로 그의 인생관을 바꾸었다. “아. 하나님도 살아 계시고 내 사랑하는 아들도 하나님 곁에서 살아 있구나”이런 믿음과 확신이 생기자 불행한 슬픔을 이기고 다시 새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 앞으로 일찍 돌아간 아들의 소원대로 그 당시 2,000만 달러를 투자해서 청년 교육을 시작하였다. 오늘날 하버드 대학교와 쌍벽을 이루는 명문 스탠퍼드 대학교는 그렇게 해서 탄생되었다. 술이 없은 대학을 설립하려는 뜻을 메이필드 시의 시장이 거부하자 자신의 말 목장 부지에 대학을 세웠다. 그이 나이 61살 때의 일이다. 대학 설립 후 8년 후인 69살에 주님 품에 안겼다. 일찍 주님 품에 안긴 아들의 이름을 따서 릴런드 스탠퍼드 주니어 유니버시티(Leland Stanford Junior University)가 정식 학교 이름이다. 영상을 보고 말씀을 계속하겠다. 

 

그는 세상을 떠나 주님 품으로 돌아가기 전이 미리 써서 남긴 유서에 “나의 재산은 한 개의 다임(10센트)도 남기지 말고 모두 다 이 땅의 청년 교육을 위해서 써 달라”라고 유언하였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캠퍼스는 8,180에이커다. 거의 1,000만평에 이르는 말 목장을 캠퍼스로 헌납하였다. 여의도가 877,000평이다. 비교가 되나.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벤처 기업가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학교 중의 하나이다. 오픈 AI 창업자 샘 올트먼,인스타그램 공동 창업자 캐빈 시스트롬, 마이크 크리거, 야후 창업자  제리 양,  스냅쳇 창업자 에반 스피켈 등 이루 다 나열 할 수가 없다. 학부 8000명, 대학원생 10000여명, 교직원과 행정 직원이 2만명이다. 죽음이 사실이듯이 부활도 사실이다. 성도는 사망을 이기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 영생의 은총을 영원히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죽어 천국도 좋지만 이 땅에서 천국 백성다운 삶을 살며, 하늘에 속한 자의 신령하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고 기대이시다. 부활의 증인다운 삶을 살아가는 은혜로운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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